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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찾느라 신발이 다 닳았어요”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10-23
동그란의 마음극장 ‘사랑은 낙엽을 타고(Kuolleet lehdet, Fallen Leaves)’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찬비가 내리고 낙엽이 발에 밟히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가을이 오는 듯이 가겠구나, 하다가 지난겨울에 본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아키 카우리스마키, 2023년)라는 핀란드 영화인데요. 영화의 끝에 흐르던 노래가 너무 익숙한데 제목이 금세 떠오르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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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이면 라디오에서 숱하게 흘러나오던 ‘고엽’이었는데 계속 뭐더라 뭐더라 하면서 치매인가 하고 절망할 때쯤에 소리 검색으로 찾아내고는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니까요. 너무 익숙한데 까맣게 멀어져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고 하나하나 옛 추억을 떠올려보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속의 세상은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 속의 달력은 2024년을 가리키고 있었지요. 마치 미래가 보낸 편지를 열어보는 기분으로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남녀가 첫 데이트 때 같이 본 영화도 찾아보았어요. 짐 자무쉬 감독의 ‘데드 돈 다이’라는 영화죠.

첫 번째 엇갈림
마트에서 일하는 알사. 하루는 유통기한이 지난 빵 하나를 가방에 넣어 퇴근하다가 해고를 당해요. 감독관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죠. “오래된 건 버려야 해요.” 알사는 말하죠. “저도 오래됐는데요.” 중년의 노동자 알사는 직장을 잃었지만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어요. 당장 다음날로 어느 술집에 찾아가 설거지하는 일자리를 얻죠. 그런데 첫 급료일에 주인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돼요. 그때 훌라파가 다가와서 차 한잔하자고 말해요. 두 사람은 안면이 한번 있긴 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죠.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찬란 제공
그날 두 사람은 함께 극장에 가서 ‘데드 돈 다이’를 봐요. 훌라파가 재미있었냐고 묻자 알사는 “네, 처음으로 실컷 웃었어요”라고 답하더라고요. 수십년 영화를 꾸준히 봐온 사람이 아니라면 좀처럼 즐기기 어려운 영화 같던데 말이죠. 극장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알사는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적어서 훌라파에게 건네줘요. 훌라파는 그걸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지만 담배를 꺼내다가 쪽지를 떨어뜨려요. 쪽지는 낙엽처럼 바람에 날아가 버렸고, 훌라파는 한동안 알사를 만나지 못했죠.

두 번째 엇갈림
훌라파와 알사는 극장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요. 알사가 말해요. “전화 안 했네요?” 그러자 훌라파가 이렇게 답해요. “내 신발 좀 봐요. 당신 찾느라 닳았어요.” 훌라파가 한 말 중 가장 로맨틱한 대사였어요. 알사는 이번에는 집 주소를 적어주면서 훌라파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요. 훌라파가 이번에는 쪽지를 지갑에 잘 챙겨 넣었어요. 수입이 없는 와중에도 알사는 훌라파를 대접하기 위해 식기를 마련하고 요리를 했어요.

약속한 날을 잊지 않고 훌라파가 꽃을 사 들고 알사의 집에 잘 찾아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날 저녁 식탁에서 훌라파는 오직 술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어요. 알사는 말해요. “아버지와 오빠가 술 때문에 죽었어요. 엄마는 슬퍼하다 죽었고요. 당신은 좋지만 술꾼은 싫어요.” 그러자 훌라파가 말했죠. “난 잔소리가 싫어요.”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두 번째 이별을 해요. 하지만 그 뒤로 밤이면 두 사람은 각자 서로를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루었어요. 훌라파가 가는 곳마다 온통 슬픈 가사의 노래들이 울려 퍼졌어요.

세 번째 엇갈림
어느 날 훌라파는 알사에게 전화해서 술을 끊었다고 말해요. 알사는 무엇 때문에 술을 끊었냐고 물었고 훌라파는 “당신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두 사람은 당장 알사의 집에서 만나기로 해요.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문 안에서 알사가 기다리는 모습이 화면에 길에 잡혀요. 훌라파는 오지 못했어요. 세 번째 이별이었어요.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쪽지를 잃어버려서, 술꾼은 싫다는 소리가 불편해서, 그리고 마지막엔 사고를 당해서 훌라파는 알사를 세 번 놓쳐요. 지독히도 운이 나쁜 사람 같아요. 다가온 기회를 놓쳐버리기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 실패하기만 하는 패턴을 가진 사람이에요.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죠. 쉽게 실패하지만 계속 기회가 돌아오는 패턴이라고 말할 수도 있죠.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에겐 계속 우연을 가장한 기회가 찾아들지죠. 훌라파는 알사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담고 있었어요. 알사를 찾아 신발이 닳도록 거리를 헤매고 다니던 훌라파였어요. 서로 이름도 몰랐지만 영화를 보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알았어요. 술을 끊으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운 상태에서도 꿈속에서는 그녀와 혼인신고를 했다고 했어요.

이 세계가 망한다 해도 남겨질 것들
인생의 시간도 가을에 접어들었는데 의지할 가족도 없이 고용상태가 불안정한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위태위태하게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외로운 중년들. 기차를 타고 멀리 석탄공장으로 일하러 다니는 알사의 처지가 남의 일이 아니더군요. 어쩌면 그렇게 50번째 가을을 맞는 내 마음과도 닮았는지요. 알사가 라디오에서 듣는 세상 소식이 온통 전쟁의 참상에 관한 것뿐이듯 내가 있는 이 세계에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하나도 없고 곧 세상이 망할 것만 같아요.

어쩌면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도 그런 심정으로 이 영화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인해 세상이 망했다고 가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지속될 삶을 상상해 이 영화를 만든 것 같아요. 여전히 문학이 있고 음악이 있고 영화가 있는 세상이라면,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어쩌면 전쟁으로 망할 세상, 영화라도 한 편 더 만들고 죽겠다 하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그의 삶은 끝나지 않았고 심지어 영화 속 알사가 거두어 키우는 개 ‘채플린’은 칸 영화제에서 팜 도그 상도 받았다죠.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이미 경험한 미래들이 온다
이 영화를 다시 보니 구들장에 불을 넣은 것처럼 마음이 은근히 데워졌어요. 알사와 훌라파는 가난하고 지쳐 보이나 낡지도 늙지도 않았어요. 알사와 훌라파는 늘 책을 지니고 있고, 노래를 감상할 줄 알며,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에요. 알사와 훌라파가 함께 보는 영화 ‘데드 돈 다이’의 세계는 온통 언젠가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본 것들로 이루어져 있더라고요. ‘데드 돈 다이’ 속 주인공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끝이 좋지 않을 게 자명하다”고 수시로 말하는데 그럼에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놓지는 않더라고요.

낙엽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죽음만이 확실한 미래라는 게 우리가 이미 읽어서 알고 있는 ‘인생’이라는 대본 속의 바꿀 수 없는 결말이지요. 그런 채로 우리는 살아나갑니다.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은 상대를 알아보고, 그를 다시 만날 순간을 꿈꾸고, 마음 붙일 무언가를 찾으면서요. 만나지만 엇갈리고 헤어지지만 재회하는 어리석고도 복잡한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면서요. 내 마음을 읽어주는 음악을 불러내고 영화와 문학 속 장면들을 참조하며 버려진 누군가를 돌보며 이 세계의 끝에 이를 때까지 살아 있는 순간들을 온전히 경험하며 나아가겠죠. 신발이 다 닳도록.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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