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국내 개봉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글래디에이터 II’에 관심이 모아지는 시점이다. 정작 제작국인 미국선 22일 개봉인데 한국선 그보다 일주일 넘게 먼저 개봉해 더더욱 그렇다. 한국이 또 다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흥행 시험대가 되는 셈이다. 참고로, 전작 ‘글래디에이터’는 무려 24년 전인 2000년 개봉해 어마어마한 흥행 성적을 거두고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 바 있다.
그런데 개봉 전 미국을 위시로 한 해외 영화 사이트들에서 거론되는 부분 중 좀 특이한 지점이 있다. 매우 지엽적인 부분으로서 영화 속편 표시 부분, ‘글래디에이터’ 속편은 그 숫자표시를 로마숫자 ‘II’로 택했단 점이다. 프랜차이즈 자체가 로마제국 시대 배경이기에 이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와 관계없이 최근 들어 할리우드영화 속편에선 로마숫자 표기가 하나둘 늘어가는 추세라는 것. 그러고 보면 ‘크리드’ ‘겨울왕국’ ‘콰이어트 플레이스’ 등도 모두 로마숫자 표기를 택한 바 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애초 할리우드영화에서 속편 숫자표시는 이 로마숫자로부터 시작됐단 점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오랜 기간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영화 속편 표시는 주로 한자어 ‘속(續)’을 사용했다. 대략 1980년대 초반까진 그랬다. 클래식 한국영화 ‘속 미워도 다시 한 번’ ‘속 별들의 고향’ ‘속 영자의 전성시대’ 등이 예다. 한편, 총알을 가리키는 ‘탄(彈)’도 자주 사용했다. ‘제이탄(第二彈)’ ‘제삼탄(第三彈)’이란 식이다.
그런데 영화 프랜차이즈 왕국 할리우드선 좀 다른 방식을 취했다. 속편에 숫자를 붙이는 건 성의도 품위도 없는 방식으로 여겨졌고, 그러다 보니 속편은 따로 독립된 제목을 설정해주는 게 상례였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1944년 영화 ‘나의 길을 가련다(Going My Way)’ 속편 ‘성 메리 성당의 종’(The Bells of St. Mary's), 1950년 히트작 ‘신부의 아버지(Father of the Bride)’ 속편 ‘아버지의 작은 배당금(Father's Little Dividend)’ 등이 예다. 여기서 후자의 방식, 즉 오리지널 제목에서 일부 단어 또는 그 전체를 취한 뒤 새 제목을 만드는 방식이 오랜 기간 인기를 얻어 ‘혹성탈출’ ‘핑크 팬더’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게 1974년 ‘대부 2’부터다. 원제가 ‘The Godfather Part II’로 나오며 갑자기 숫자표시가 등장했고, 그것도 낯선 로마숫자 표기였다. 어딘지 클래식 문학의 향취를 주려한 듯 여겨지는데, 그와는 아무 상관 없고 그저 또 다른 대중문화 분야인 대중음악계 유행을 따른 것이란 해석도 많다. 당시 인기 절정의 영국 록그룹 레드제플린이 4집까지 앨범 제목에 로마숫자를 달아 ‘Led Zeppelin II’ 등으로 표시하고 있었고, 또 다른 전설적 영국 록밴드 비틀즈도 ‘Beatles VI’란 앨범을 낸 바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대부 2’가 전편에 이어 흥행에 성공하고 전편처럼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수상하면서 이 로마숫자 표시는 할리우드서 일종의 트렌드가 됐다. 이후 ‘프렌치 커넥션’ ‘록키’ ‘스타워즈’ ‘슈퍼맨’ ‘람보’ ‘스타트렉’ ‘베스트 키드’ ‘백 투 더 퓨쳐’ 등 할리우드 프랜차이즈들이 일제히 로마숫자로 속편을 표시했다. 이에 해외영화계, 특히 한자문화권 영화계까지 영향을 받아 1987년 등장한 이두용 감독의 액션영화 시리즈 ‘돌아이’ 3편은 ‘돌아이 III’란 타이틀로 등장하고, 같은 해 홍콩영화 ‘영웅본색’ 속편도 ‘영웅본색 II’로 등장하게 된다. ‘백 투 더 퓨쳐 II’ 등 할리우드영화 속편도 국내서 그대로 로마숫자 표기를 따랐음은 물론이다.
이후는 좀 더 복잡해졌다. 1970년대 ‘워킹 톨’ ‘죠스’ 등의 속편과 함께 아라비아숫자 ‘2’ ‘3’도 로마숫자와 함께 널리 쓰였고, 한국선 ‘애마부인’ ‘뽕’ 등 수많은 성애영화 속편들이 이 표시를 처음 적극적으로 취했다. 이 흐름이 얼마 전 개봉한 ‘베테랑 2’까지 이어진다. 한편, 숫자표시를 없애고 부제로만 구분한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의 대성공 이후론 그도 인기를 끌어 한국서도 ‘조선명탐정’ 프랜차이즈 등이 그를 취했다.
이밖에도 많다. 21세기 들어 국내에 ‘미드’라 불리는 미국드라마 열풍이 온라인을 타고 퍼지면서 미국드라마의 시즌 구분을 그대로 영화에 적용한 예도 등장하게 됐다. 2007년 영화 ‘색즉시공 시즌 2’다. 한편, 할리우드서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 ‘배트맨 비긴즈’ ‘슈퍼맨 리턴즈’ 등의 표시가 등장해 시대를 풍미하자 한국서도 2015년 ‘탐정: 더 비기닝’과 그 속편 ‘탐정: 리턴즈’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할리우드서 택하는 표시와 표기를 따라간단 인상이 강하다.
할리우드서 로마숫자 표시가 사라지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하다. 할리우드 자체가 프랜차이즈 왕국으로 진행되면서 프랜차이즈 장기화가 일어났고, 그러다 보니 저 로마숫자들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는 사례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장 ‘스타트렉’ 프랜차이즈만 해도 저 로마숫자 표기를 6편까지 사용했는데, 3편까진 말 그대로 줄이 둘, 셋으로 늘어나는 형태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웠지만 4(IV)편부턴 잘 알아보기 힘들단 반응이 늘어났다. 실제로 ‘록키 5’의 경우 ‘V’를 그저 ‘브이’로 인식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2000년대 들어선 점차 사라져 간 트렌드가 됐고, 특히나 한국선 더더욱 그렇다.
당장 ‘크리드 II’나 ‘겨울왕국 II’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분명 한국판 영화포스터엔 로마숫자로 적혀있지만 국내 언론미디어 등에선 이를 모조리 아라비아숫자 ‘2’로 바꿔 표시하고 있다. 이미 낯설어진 표기이니 언론미디어는 배급 측에서 의도한 대로 따라가질 않는 것이다. 상당 부분 ‘글래디에이터 II’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크리드’ 프랜차이즈도 2편에선 원제 그대로 로마숫자를 사용했지만 위 문제를 인식한 듯 3편 이르러선 원제는 ‘III’로 나왔지만 국내선 ‘3’으로 바꿔 표시하고 있었다.
서두에도 언급했듯, 사실 이런 사연들도 엄밀히 따지면 참 지엽적인 문제고 대중소비자 입장에선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는, 아니 사실상 잘 인식되지도 않는 지점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 마케팅 차원에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고, 향후 한국영화의 프랜차이즈화 전략 차원에서도 한 번쯤 되돌아볼 만한 역사가 맞다. 속편의 역사와 함께 그 속편을 ‘팔기 위해’ 취한 각종 홍보 툴의 좌충우돌 케이스 스터디들로서 말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