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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일할 권리를'... 그 운동 시작한 사람입니다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11-04
[열 개의 우물] 육아의 문제 사회화 위해 탁아운동 벌인 '지탁연' 이야기다큐멘터리 <열 개의 우물>이 2024년 10월 30일 개봉했다. 70-80년대 여성노동과 인천 빈민지역의 탁아운동을 함께 했던 여성들을 찾아가고 있다. 그녀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그 시대를 살았는지, 그 이후의 삶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담고 있다. 가난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따뜻하게 함께 품어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서 열 편의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말>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온 내게 가장 의미 있고 영향을 많이 준 운동이 무엇이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 활동'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아이를 돌보는 현장과 현장을 돌보는 사무국에서 일하며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이하 '지탁연') 활동을 했다. 지탁연은 지역사회 아동교사회로 시작해서 몇 날 며칠을 머리를 맞대고 격론 끝에 만들어낸 조직명이다. 그때는 문구 하나 제목 하나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채택했다.

여기서 지역 사회는 아주 작은 단위에서부터 큰 단위까지 하나로 연결된다는 의미이고, 당시 남한사회에서는 북한을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아이와 엄마를 강제로 떼어 놓는 곳으로 인식돼 있었다. 북한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무조건 나쁘게만 전달하는 것은 서로의 혐오를 더 강화시켜 분단을 고착화시킬 뿐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탁아소의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

엄마에겐 일할 권리를, 아이에겐 보호받을 권리를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 활동을 하던 최선희ⓒ 최선희
"엄마에게는 일할 권리를! 아이에게는 보호받고 교육받을 권리를!"

이것은 엄마인 여성이 일을 할 권리도, 아이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교육받을 권리도 전무했던 시기에 만들어낸 우리의 캐치프래이즈다. 남편은 일하고 여성은 아이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일을 하면 남편은 경제적으로 무능하거나 부자연스런 가정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어쩌다 아이를 맡기거나 찾으러온 아이 아빠는 고개도 잘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 있는 모습이 많았다.

1987년 지탁연의 회원 어린이집(혹은 탁아방)은 빈민·공단지역에 전국적으로 약 100여 개가 있었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탁아소들은 공간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건물을 세우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았기에 주로 진보적인 교회나 사찰의 공간에 만들어지기도 했고, 또 몇몇은 자체적으로 돈을 모아 탁아소를 만들기도 했다.

탁아활동가들은 주로 신앙에 기초했거나, 사회과학적 인식에 기반했거나,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주도해 결혼 이후 육아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었다. 손이 모자라고 장소가 마땅치 않아 미처 돌보지 못하는 수많은 아이들의 육아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가 당시의 가장 큰 과제였다. 활동가들은 낮에는 아이들을 돌보고 밤에는 모여서 공부하는 멀티 플레이어들이었다.

장미경이 <여성2>에 기고한 '탁아소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르포가 아마도 최초로 노동 빈민층의 탁아문제를 사회에 제기한 글일 것이다. 장시간 일을 해야 하는 엄마들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시골의 친정이나 시댁 어른들에게 맡기거나, 그것도 안 되면 어쩔 수없이 아이들을 방에 둔 채 요강과 밥상을 방 안에다 넣어놓고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일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혜영이 용철이 사건'과 '세 쌍둥이 사망 사건'도 이런 환경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아이들이 장롱이나 서랍장을 뒤지면서 성냥개비를 가지고 놀다가 불이 난 것이다. 그때 그 어린것들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다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혜영이와 용철이의 죽음을 접하며 이 사건을 노래로 만든 사람은 정태춘·박은옥이었고, 이애주는 춤으로 그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이는 부모의 아픔을 위로하고 어른으로서 반성하는 '성문밖 교회'에서의 '혜영이 용철이 위령제'로 이어졌다. 아마도 적절한 장소를 구하지 못해 교회에서 했던 것일 텐데, 위령제를 허락하셨던 목사님은 교단에서 처분을 받아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들었다. '백제 화장터'에서 혜영이와 용철이의 유골함을 가슴에 품고 나오던 부모의 참담한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현장에는 돌아가신 박영숙 평민당 부총재도 있었다. 지탁연 사무국장 시절, 나는 '탁아소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박영숙 평민당부총재, 시민합동법률사무소의 박주현 변호사와 함께 만들었다. 초안은 유급 육아휴직을 받으면서 본인만 누리는 호사가 너무나도 미안하다며 박주현 변호사가 세계 곳곳의 탁아법률을 참조해서 우리의 처지와 상황에 맞는 내용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한국여성단체연합 내 탁아문제 특별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탁아소 운영에 관한 법청원'을 통해 입법에 힘썼고, 결과적으로 지금의 '영유아보육법'이 만들어지게 됐다. 입법운동은 문제제기를 넘어 먼저 대안을 고민했고, 그 내용을 공유하면서 함께 목표를 쟁취했던, 어느 운동보다도 앞서가는 대안운동으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지탁연은 동지로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고 헌신적으로 아이를 돌보며 치열하게 살았다. 아이를 돌본다고 해서 그 치열함이 다른 운동에 비해 덜하지는 않았다.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밤에는 모임을 하면서, 지역의 공동체성을 살리고 여성에게 닫혀 있는 벽을 깨기 위해서, 내가 돌보는 아이들의 참교육을 위해서, 정말 정성을 다했다.

여전히 미완인 육아의 사회화... 운동을 멈춰선 안 된다

지역·여성·아동의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 우리는 탁아운동론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여성운동으로서의 탁아운동, 지역운동으로서의 탁아운동, 교육운동으로서의 탁아운동으로 나열되던 문제를 끊임없이 토론하면서, 마침내 '탁아운동이란 여성과 가정에게 지워졌던 육아의 문제를 사회화시켜내는 운동'으로 정리됐다.

진정한 육아의 사회화란 구조적 모순 속에서는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에, 구조적 모순을 함께 격파해야 한다는 변혁 운동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깨어나는 여성이 주체가 돼 당당히 육아의 사회화를 외치고 스스로 그러한 목표를 쟁취해가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일하는 어머니 큰 잔치'를 개최해 전국에서 일하는 엄마들이 함께 모여서 탁아소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우리들이 낸 세금을 우리 아이들에게', '버스정류장 수만큼 탁아소를!'를 이라는 슬로건을 외치기도 했다.

탁아법 제정을 요구할 때는 '어머니 대회'를 문화적인 나눔 잔치로, 서로를 격려할 때는 '어머니 큰 잔치'로, 그때마다 대학의 강당과 운동장은 우리의 대회의장이었고 잔치를 위한 장이 됐다. 100여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와 1500명이 넘는 부모들이 함께 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축제였고 외침이었다. '8시간 일하고, 8시간 잠자고, 8시간 쉬고 싶다!'라는 대형 현수막이 내 걸렸을 때의 감격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제도가 마련됐다고 해서 8시간 일하고, 8시간 잠자고, 8시간 쉬는 것이 아직도 쉽지 않은 현실에 씁쓸해지기도 한다.

지탁연 운동은 '온 마을이 한 아이를 키운다'는 인디언의 격언처럼, 온 마을이 한 아이를 키우는 운동이었다. 도시 재생이나 마을 가꾸기 운동 이전에, 거의 40년 전에 시도했던 운동이었다.

공동체성은 말로 외친다고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실현의 내용이 있어야 한다. 탁아소 한곳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헌신적인 교사는 기본 전제였다. 함께 운영하는 부모들과 교육의 중심인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수많은 후원자들과 동네 주민들이 탁아소 운영을 위해 함께 시도했던 헌옷 바자회와 일일찻집 등의 활동은 공동체성의 확보를 가능케 했던 아름다운 축제의 장이었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행복한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일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사무국이 필요했는데, 사무실 유지비며 인건비가 만만치 않았다. 정현백 교수님이 독일의 NGO인 '인간의 대지'와 연계해 주셔서 연간 3000만 원의 지원을 약 3년간 받을 수 있었고, 그 기반 위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3년이 지나자, "이제는 너희 나라도 제1세계가 되었으니 제3세계로 지원을 옮겨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기획돼 운영되던 것이 '우리네 방앗간'이었고, 그 책임은 온전히 내게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기획들은 지금의 사회적 기업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험과 전문성의 부족으로 그 역할을 다 해내지는 못했지만, 매우 의미 있는 시도였던 것은 분명하다.

사무국을 운영했던 나는 도매상가를 뒤져 공동으로 문구를 구매해 싼값에 탁아소들이 이용하게 했고, '모아방' 등 어린이 옷을 만드는 곳의 후원을 받아 헌옷 바자회에 약간의 흠이 있는 옷들을 팔 수 있도록 봉고차로 날랐고, 패티김과 쟈니윤 디너쇼 공연 수익금의 일부인 약 700만 원을 탁아소 운영비로 후원받기도 했다. 가까이서 스타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표를 팔았던 이싹회(이대어린이집어머니들)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법이 만들어지자, 100개소였던 탁아소는 단숨에 2000개소로 늘어났고, 지탁연은 정부의 대화 파트너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지탁연이 가지고 있던 운동적 의미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완성을 요청받고 있다. 아이 키우기 힘들어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이 늘어나 인구 절벽에 놓이게 된 것은 육아의 완전한 사회화가 아직도 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운동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소회를 전하기는 했지만, 능력의 한계로 탁아운동의 크고도 깊은 의미를 다 담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모인 이들의 마음을 담아낸 운동으로서의 가치는 많은 이들에게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최선희는 현재 사단법인 조각보 이사장이며, 순창에서 빵을 굽고 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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