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스페인 빅토르 에리세 감독 신작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스페인 거장 빅토르 에리세 감독은 31년 만에 내놓은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통해 ‘영화는 기적임을 믿는다’며 ‘당신에게도 기적일 수 있다’고 관객에게 손을 내민다.
영화감독이자 작가 미겔(마놀로 솔로)은 1990년대 초반 영화 촬영 중 종적을 감춘 친구이자 배우 훌리오(호세 코로나도)와 관련한 TV쇼에 출연한 뒤, 실종된 친구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는 미겔의 잃어버렸던 영화에 대한 열정을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친구가 실종되고 영화가 중단된 뒤, 더는 영화를 찍지 않았던 미겔은 훌리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자연스레 그와 찍었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잊고 지냈던 삶의 파편들을 맞춰 나간다.
요양원에서 발견된 훌리오는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친구 미겔도, 자신의 딸 아나(아나 토렌트)도 알아보지 못한다. 미겔은 훌리오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그가 찍었던 영화 속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극장에 상영하기로 결심한다. 망각의 강을 건넌 지금의 모습과 달리, 영화에서 그는 ‘예전처럼 온전히 거기 있으니까’.
영화가 상영되고, 한동안 스크린을 응시하던 훌리오는 눈을 감는다. 그는 기억을 되찾았을까. 영화는 기적이 될 수 있을까.
1940년생인 에리세 감독은 1973년 장편 데뷔 영화 ‘벌집의 정령’으로 세계영화계의 찬사를 받으며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후 50년간 그가 연출한 장편영화는 단 네 편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1992년 다큐멘터리 영화 ‘햇빛 속의 모과나무’ 이후 한동안 찍지 않았다. 특유의 완벽주의적 성향과 굽히지 않는 영화적 소신 때문에 공백이 길어졌다.
오랜 침묵을 깨고 내놓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에리세 감독의 영화 세계가 집대성됐다. 우선 극 중 미겔과 그의 실제 삶의 궤적이 유사하다. 미겔이 친구의 실종 뒤 영화를 찍지 않은 것처럼 에리세 감독도 1992년 영화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멈춰있었다. 미겔이 훌리오와 찍은 영화 속 영화 ‘작별의 눈빛’은 노쇠한 아버지가 잃어버린 딸을 찾는다는 이야기. 죽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려는 한 소녀의 이야기인 감독의 미완성작 ‘남쪽’(1983)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그의 최고작이라 여겨지는 ‘벌집의 정령’에서 주인공 소녀였던 아나는 이번 영화에 훌리오의 딸로 출연해 50년 만에 호흡을 맞췄다.
“필름 영화는 구시대의 유물이고, 우리는 고고학을 하는 것”이란 친구 막스의 말처럼 디지털로 대체되기 이전의 영화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영화의 시작점이라 일컬어지는 ‘열차의 도착’을 시작으로 무르나우와 니콜라스 레이 등 명감독들이 언급되는 가운데, “칼 드레이어 이후 영화에 더 이상 기적은 없다”는 대사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인물들이 주고받는 시선은 클로즈-업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됐다. 아울러 배우들은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도 동참하길 기대한다.
기억을 잃고 삶의 끝자락에 다다른 훌리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미겔의 시도는 영화를 통해 망각이란 깊은 늪에서 깨어나는 기적을 여전히 꿈꾸는 감독의 대답이다. 아울러 모든 것이 손쉽게 잡혀 모든 것을 잊고 사는 디지털 시대, 기억을 잃은 망자들인 관객에 대한 권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