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 가정 현실 닮은 홍콩 영화 ‘연소일기’영화 ‘연소일기’. 누리픽쳐스 제공“나는 쓸모없는 사람이고 빠르게 잊힐 것이다.”
홍콩의 한 고등학교. 휴지통에서 발견된, 유서로 보이는 쪽지를 보고 교사들이 대책을 논의한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잡음 없이 조용히 넘어가려는 다른 교사들과 달리 정 선생(노진업)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쪽지의 주인을 찾기 위해 애쓴다. 그가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어린 시절 같은 구절을 한살 많은 형의 일기에서 봤기 때문이다. 형은 떠났고 그는 형이 떠난 자리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어른이 됐다.
13일 개봉하는 홍콩 영화 ‘연소일기’ 첫 장면에서 꼬마 요우제(황재락)는 허공을 향해 “요우제,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넌 꼭 홍콩대에 가야 해” 외친다. ‘홍콩대’를 ‘서울대’로 고치면 이게 한국 영화인지 홍콩 영화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국과 비슷한 현실이 담겨있다. 자식이 엘리트로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과한 교육열과 애정을 빙자한 폭력, 죽고 싶은 마음 털어놓을 곳 하나 없는 청소년들의 고립감이 2024년의 한국 학교와 가정을 들여다보는 창문처럼 보인다.
영화는 유서의 주인을 찾으려는 정 선생의 현재와 깊이 숨겨뒀던 형의 일기를 꺼내 읽으며 회상하는 그의 과거를 교차시킨다. 즉 정 선생이 살아남았으나 평생 죄책감에 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요우쥔이다. 요우제는 만화를 좋아하고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를 쓰는 평범한 아이다. 공부와 악기, 모든 면에서 요우쥔에게 한참 뒤지는 요우제를 채찍질하기 위해 변호사인 아빠는 그가 좋아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치워버린다.
영화는 단순히 나쁜 아빠와 약자인 아이, 무능한 학교라는 평면적인 도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국면에서 요우제가 내민 손을 자신도 모르게 뿌리쳤던 요우쥔과 엄마의 무지와 회피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에서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주인공을 연기했던 히이라기 히나타에 비견될만한 배우 황재락의 섬세한 연기가 때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만큼 보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연소일기’가 단순한 사회비판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이유는 형이 겪었던 고통의 냄새를 맡은 요우쥔, 즉 정 선생이 위기에 놓인 학생을 돕기 위해 애쓰면서 자물쇠를 굳게 채워놨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시 직시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가는 과정까지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어린 시절의 상처로 내면에 웅크린 아이를 끌어안고 사는 어른들에게 얄팍한 위로가 아닌 치유를 이야기한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는 탁역겸 감독은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그것에 대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소일기’는 그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