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작에서부터 성 노동자와 그들이 마주하는 사회에 관심을 가져왔다. 왜 이 주제를 관객에게 연결하고 싶었나. 성 노동자에 관한 리서치를 진행하면서 실제 성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친구들을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과 가까워졌고, 이들로부터 무수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 노동에도 얼마나 많은 양상이 다르게 드러나는지 깨달았다. 그런데 세상은 정작 그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들에겐 아직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성 노동 산업엔 오직 낙인만 있을 뿐, 이들의 삶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 남아 있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낙인에 관하여 인간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빌려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이해하고, 이들과 더 연결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만들고 싶다.
-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이반(마르크 예이델시테인)의 시한부 섹스 파트너이자 연인으로 지낼 때까지만 해도 무척 여유롭고 심지어 우아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결혼 이후 아노라는 몹시 조급하고 이반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노라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 이건 숀 베이커 감독이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관점이기도 한가. 오, 난 결혼했다. (웃음) 이반과 아노라의 결혼관을 정해두진 않았다. 아노라와 이반은 딱 일주일 동안 함께했다. 둘의 관계가 진실된 사랑이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비현실적인 믿음에 가깝다. 다만 내 생각에 아노라는 진짜 그렇게 될 수 있던 잠재적 가능성이 있었던 것 같다. 아노라는 진심으로 이반과 함께하고 싶어 했다. 라스베이거스 호텔에서 아노라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네가 나중에 보고 싶어질 것 같아”라고 말하는 장면. 평소 스트립 클럽을 찾는 남자들에게 아노라가 하는 행동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아노라의 진솔하고 정직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다음에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해?”라고 덧붙이는 것도 사실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색해서다. 아노라는 그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 미묘한 먹먹함을 마이키가 너무나 훌륭하게 소화해줬다. 이반의 마음은 전혀 다르다. 이반은 미성숙하다. 어떤 것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아노라의 감정이나 삶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 이반을 잡기 위해 찾아온 세 남자는 이반과 아노라의 결혼을 취소하고 원상복구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적인 태도를 띠지는 않는다. 오히려 광분하는 아노라를 진정시킨 뒤 이성적으로 이해시키고 설득하려 한다. 우락부락한 외형으로 인한 선입견을 전복시킨다. 내가 그런 걸 워낙 좋아한다. 특정한 편견을 만들어두고서 막 무너뜨린다. (웃음) 관객은 아노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두 남자가 집을 침입했을 때 무척 무서웠을 것이다. 모르는 남자 둘이 집에 들이닥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게다가 한명은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이들은 아노라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빌고 서로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가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들이 얼마나 유순한 사람인지 밝혀질 때 그때 웃음이 만들어진다. 오히려 23살짜리 어린 여자가 상황을 쥐락펴락하니까.
- 세 남자의 주거침입과 아노라의 육탄전은 작품의 전개 속도를 높이면서도 숀 베이커식 코미디를 수행하는 중요 장면이다. 모든 게 난장으로 펼쳐지는 터라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한정된 촬영 시간으로 정말 초조했다. 이 장면을 찍는 데만 8일이 걸렸다. 원래는 6일밖에 주어지지 않았는데 한번 해보니까 느낌이 오더라. 이튿날 바로 <아노라> 프로듀서인 서맨사 콴과 알렉스 코코에게 달려가서 이틀만 더 달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8일 동안 촬영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스크린으로 볼 때는 그저 어느 날 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날씨와 조도가 일정해야 하고 이야기 흐름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했다. 갑자기 시간이 튀는 듯한 느낌을 몹시 싫어해서 신별로 촬영 동선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이어갔다. 액션신도 배우들이 직접 수행했기 때문에 시간을 챙기는 것과 동시에 안전문제까지도 돌봐야 했다. 정말 쉽지 않았다. 굉장히 복잡했다. 그렇지만 해냈지! (웃음)
- 아노라의 가족이 이반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알면 탐낼 거라는 말이나 함께 일한 동료가 아노라의 행복을 쉽게 축복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그가 주변인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안정된 행복과 거리가 먼 아노라는 이반을 통해 또다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다. 빈약한 신데렐라에게 서글픈 감정이 순환되는 게 다소 잔인해 보이기도 하는데. 질문에서 아노라를 향한 애정이 느껴진다. (웃음) 사실 영화에서 아노라에 관해 언급되는 것들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아노라의 전사를 뜻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이 너무 흥미롭다. 관객들의 생각을 듣는 자리가 늘 반갑고 행복한 이유도 그렇다. 아노라가 맺은 자매와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는 다시 들여다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늘 좋지도 않고 늘 나쁘지도 않은. 우리 모두의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아노라 혹은 아노라와 같은 사람들 인생의 일부만을 보여준다. 내가 아노라의 선택과 배경에 너무 명확한 답을 내버리면 관객이 자신의 생각을 펼칠 여백이 없다. 그리고 실제 성 노동자들에게도 실례일 것 같다. 아노라가 왜 이 일을 택했고, 이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디테일하게 접근하는 순간 내 마음대로 일반화하게 돼버린다. 조금 더 섬세한 여백이 필요했다.
- 동시에 영화는 아노라에게 선물도 준다. 바로 이고르(유리 보리소프)다. 아노라에게 “괜찮냐?”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처음 <아노라>를 쓸 때 엔딩에서 관객들이 자기만의 해석과 에필로그를 스스로 써내려가길 바랐다. 그래서 만든 게 이고르다. 이고르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아노라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를 한명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아노라의 생각을 존중해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반과 이반의 가족을 아노라에게 잘못 걸린 피해자처럼 여기지만 이고르는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한다. 이중에서 이고르만이 아노라의 결혼이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바라본다. 이고르 역의 유리 보리소프 배우와 함께한 건 큰 행운이었다. 믿을 수 없게 훌륭한 배우다. 인물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 촬영장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