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족들은 너 이러는 거 알아?” 뉴욕 스트립 클럽의 댄서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많은 손님이 찾는 에이스로서 환호를 받는 한편 그들로부터 멸시의 언어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아노라를 상처입히진 못한다. 그는 이미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 자기가 클럽에 온 사실을 가족이 알면 큰일 난다며 웃는 손님이나, 스트립 댄서가 자신의 딸을 닮았다는 말을 한 뒤에 다음 방문을 예약하는 남성들. “그 아저씨 이상하다”는 동료의 말에 “왜? 살인마 같아?”라고 되묻는 대화 등에서 아노라가 거쳐온 남성들이 공통적으로 어떤 모순을 지녔는지, 댄서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아노라가 러시아인 이반(마르크 예이델시테인)을 만난 건 그가 인기 많은 댄서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들은 잘 모르는, 아노라만이 할 수 있는 것. 비록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잘하고, 그것조차도 다소 어눌하지만 러시아어는 아노라에게 새로운 기회의 가교가 되었다. 생각보다 둘은 잘 맞았다. 아노라는 여느 날처럼 능수능란하게 관계를 리드했고 이반은 그의 여유를 즐겼다. 짧았던 유흥은 클럽 밖에서 더 오래 이어졌다. 이반은 아노라를 집으로 불러 러시아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일주일을 자신과 함께 보내자고 제안한다. 시한부 연인. 그들에게 새로 붙여진 이름이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손은 누구의 것인가술과 도박, 코카인과 섹스, 게임과 클럽, 소비와 사치. 이반과 아노라의 일주일은 온통 소모적이고 중독적인 것으로 채워졌다. 전용 제트기를 타고 친구들과 라스베이거스로 향한 것도 오직 원초적이고 충동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무절제에 익숙해진 커플은 마법의 주문에 걸린 것인지 무언가에 홀린 것인지 돌연 결혼식을 올린다. “나 너랑 진짜 결혼하고 싶어. 너무 떨려서 러시아어로 말할게. 너랑 있으면 돈 한푼 없어도 행복할 것 같아.” 둘만 아는, 진심 가득해 보이는 이반의 프러포즈와 함께. 하지만 현실은 이들의 바람과 달리 순탄치 않다. 결혼 사실을 알게 된 이반의 집안 사람들이 “창녀와의 결혼”에 길길이 날뛰며 혼인을 무효화하기 위해 이반의 집으로 날아오기 때문이다.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 가닉(바체 토브마시안), 이고르(유리 보리소프) 세 남자의 등장과 함께 행복을 꿈꾸던 신데렐라의 꿈은 그대로 균열나기 시작한다.
아노라와 이반의 관계에서 늘 우위한 선택권을 쥔 건 아노라였다. 러시아인 남자에게 갈까 말까, 그에게 더 나은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까 말까, 일주일간 그의 연인이 될까 말까, 이 결혼을 승낙할까 말까. 그는 이반가(家)의 말마따나 창녀지만 자기 사정에 쫓기지 않는다. 오히려 늘 여유롭고 느긋해서 우아한 인상까지 준다. 하지만 그의 결혼이 무산될 위기 앞에서, 더구나 이반이 도망가버린 상황 속에서 아노라의 태도는 완전히 전복된다. 아노라의 불안감이 가속도를 높일수록 이 관계의 유지 권한 또한 자연스레 이반에게 위임된다. 이제 결정권자로서의 아노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욕설과 고성, 육탄전으로 자기 방어하기 급급하고 집착적으로 도망간 연인을 찾아내려는, 이반의 선택이 너무나 절실한 피구원자만이 있을 뿐이다.
완전히 기울어버린 관계의 중심축에는 이반을 처음 이어준 아노라의 무기, 러시아어가 있다. 어눌한 러시아어와 영어로 뒤섞인 불균등한 대화는 아노라가 이반의 언어를 ‘알아듣게’ 하지만, 이반이 아노라의 언어를 ‘선택’하지 않게 한다. 두 언어 중 러시아어가 소통 언어로 결정된 것은 오직 그를 이해해야만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아노라의 사정 때문이다. 한쪽으로 쏠린 언어 권력 속에 아노라는 주어진 상황에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이들의 결혼을 되돌리기 위해 세명의 사내가 집 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아노라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다섯번이나 묻지만, 폭격처럼 쏟아지는 러시아어 사이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다. 마치 그곳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신데렐라와 성냥팔이 소녀 그 사이숀 베이커 감독은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아노라>를 ‘현실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표현했다. “고작 일주일의 단꿈으로 진실된 사랑이 맺어질 거라는 환상이나 프린스 차밍에 대한 소망이 깨진 다음에의 이야기를 펼쳐내려 했다. 동화가 공상이라면 영화는 현실이다.”(숀 베이커) 전용 제트기를 타고 라스베이거스를 가던 공주님은 이제 갓난아이가 빽빽 우는 비행기 이코노미석에서 덩그러니 남은 현실을 발견한다. 이 사실을 깨닫기 전과 후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아노라의 절망과 낙담은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아노라가 경험한 것이 정말 계급적 수직 상승이었을까. 그렇다면 아노라는 왜 이반과 (보편적으로 고급 문화로 여겨지는) 오케스트라나 오페라가 아니라 클럽 문화를 누렸을까. 왜 갤러리에서 고전미술이 아닌 호텔 루프톱의 코카인을 즐겼을까. 이반 부모의 무례하고 무책임한 언행 속에는 어떤 교양이 있을까. <아노라>는 결혼 제도를 통한 계급 상승을 꿈꾸는 성 노동자에게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고 저지하는 영화가 아니다. 만일 그게 목적이라면 아노라는 단편적으로 자기 주제도 모르는 아둔한 인물에 그치고 만다. 그보다 <아노라>는 생애 없던 것이 갑자기 주어졌을 때, 이것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어떻게 탈이 나는지 약자 위치에서 관찰한 작품에 가깝다. 집 앞을 지나가는 기차 때문에 소음 가득한 작은 방에서 지내고, 남성들과 남는 시간에 뭘 해야 할지 몰라 성적 유희만 제안해온 아노라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경험하며 성 노동자로서 삶의 결핍을 발견한다. 아노라를 악인으로 몰아가는 모든 인물 사이에서 유일하게 그의 안부를 묻고 달래주는 이고르가 등장한 것도 진짜 아노라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반과 이고르. 둘을 올려둔 천칭은 아노라의 슬픔 속에서 암묵적이지만 확고한 답쪽으로 기운다.
‘빛.’ 우크라이나 언어로 ‘아노라’가 지닌 뜻이다. 아노라는 어쩌면 계급 상승을 뜻하는 신데렐라보다 사회적 사각지대에 내몰린 성냥팔이 소녀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자신을 빼고 모두가 따뜻한 저녁을 보낼 때, 겨울바람을 피하기 위해 홀로 성냥을 하나씩 켜던 아이. 작은 성냥 불빛 사이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몽환에 젖어 있다가 빛이 꺼지면 차가운 현실만이 남는다. 아노라는 다시 스트립 클럽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다른 삶을 선택할까. 엔딩 장면의 멈추지 않는 자동차 와이퍼 소리 사이로 자연스럽게 영화 바깥을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마지막 성냥불은 켜질까. 그것은 아노라(빛)가 결정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