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디베르티멘토>1985년 어느 밤, 거실로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이는 부모님이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걸 발견한다. 조용히 화면에 집중하는 어른들의 시선을 따라 아이가 도달한 것은 라벨의 '볼레로'가 연주되는 텔레비전 속 연주다. 정교한 소리의 조합은 여자아이의 귀에 새겨진다.
1995년 파리 교외에 거주하는 북아프리카 이민자 가정의 자매는 부모님과 친구들의 격려 속에 파리 시내로 향한다. 알제리 출신 '지우아니' 집안 쌍둥이 자매 중 '페투마'는 첼로, '자히아'는 비올라 연주자다. 둘은 파리 부자 동네에 자리한 명문 음악학교에 편입한 것이다. 둘 다 오랜 음악교육에 참여한 베테랑이다. '자히아'는 지휘자 과정도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파리 사람'과 '교외 사람' 사이 보이지 않는 장벽은 높았다. 명망 높은 음악가 집안 자제들로 구성된 새 동기생들은 지우아니 자매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 자매가 자신들을 소개하는 시간에 경력을 설명해봐야 시골뜨기 취급이다. 동기들은 자신들의 엘리트 코스 외에는 다른 경력을 인정해줄 기색이 없다.
담당교사는 자히아가 지휘자 과정을 준비한다는 걸 듣고 지휘자 과정 에이스인 랑베르와 교대로 연주 지휘를 맡긴다. 하지만 랑베르는 물론, 다수 동기생이 자히아의 지휘에는 태업한다. 열심히 준비를 해봐야 연주자들이 따르지 않으니 소용이 없다. 자히아는 혼란스럽다.
그런 자히아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초빙된 자리에서 지휘 실력을 선보이고 가능성을 인정받은 덕분에 주말마다 첼리비다케의 워크숍에 참여하게 된다. 하늘에서 동아줄을 내려준 기분이다. 그렇지만 학교에선 여전히 텃세에 시달리며 제대로 연습을 할 수가 없다. 고심 끝에 자히아는 원래 다니던 교외 음악원 동료들과 자신에게 편견이 없는 지금 동료들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려 한다. 목표는 1년 후 경연대회다.
음악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도전 ▲ 영화 <디베르티멘토> 스틸 이미지ⓒ 찬란
영화 속에서 주인공보다 돋보이는 건 '변장한 천사' 같은 조력자들이다. 자히아의 자질을 알아보고 편견 없이 기회를 제공하는 담당교사, 재능을 개화할 기반을 만들어주는 마에스트로, 한마음으로 옳은 방향으로 성장하도록 원하는 부모, 음악적 동료이자 상담까지 도맡는 동생 페투마가 위기에 몰릴 때마다 활약해준다. 이는 나약한 주인공을 부각하려는 것보다는, 영화의 중층적 포석이다.
영화 속 시간대를 고려해보자. 1995년은 자매가 나고 자란 파리 교외에서 시위와 폭동이 분출하던 시절이다. 작품 속에서 자매의 아빠는 거듭된 시위로 교외와 시내 간 교통이 혼잡해지자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딸들을 통학시키려 운전대를 잡는다. 잠에서 덜 깬 자매가 이대로 가면 등교 3시간 전에 도착할 거라 푸념하자, 늦는 것보다는 일찍 가는 게 좋다며 넘긴다.
1995년엔 한 편의 영화가 프랑스를 뒤집어놓았다.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는 흑백화면에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의 사회갈등을 수면 위로 올린다. 경찰에 대항하는 하층민 청년들의 봉기 풍경은 은폐된 현실을 개방해 버렸다. 이후 '방리외'(교외) 지역에서 폭력적인 삶과 폭동의 풍경은 하나의 '장르'가 된다. <디베르티멘토> 속에서 격렬한 충돌은 드러나지 않지만, 랑베르 vs. 자히아 구도는 그런 갈등을 은유하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두 영화의 방법론은 무척 다른 방향을 택하는 게 흥미롭다. 대부분 '방리외 영화'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사회문제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 현실은 근래 극우세력이 기세를 떨치는 정치적 격변과 직통한다. <증오> 후예인 '방리외 영화'들은 현실의 풍경을 은폐하지 않고 미디어에 소외된 지형을 환기하고자 한다.
반면, <디베르티멘토>는 주인공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주변의 지원을 등장시킨다. 상투적인 위기 극복 서사로 볼 수도 있지만, 환경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계기로도 읽힌다. 조력자들을 만나고 못 만나고가 교외 지역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결정적 분기점인지 이해한다면 제작진의 의도와 방향성 이해는 어렵지 않다.
문화예술은 세상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 영화 <디베르티멘토> 스틸 이미지ⓒ 찬란
독설가 스승 첼리비다케가 툭툭 던지는 몇 마디는 무게감이 남다르다. 클래식이 박물관 유물처럼 갇히지 않고, 작곡가의 의도를 숙지해야 한다는 스승의 조언은 독학으로 출발해 지휘의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해온 자히아에게 영감으로 작용한다. 물론 쟁점은 남는다. 엘리트 음악교육의 예술적 완벽주의와 주인공이 추구하는 음악으로 사람들을 바꾸고 싶다는 소망은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길이라도 경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자히아의 노력에도 오케스트라 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유한 후원자와 풍부한 자원을 갖춘 시내 명문 교육기관에 비해, 교외 지역 지자체는 클래식을 향한 관심도, 투입할 수 있는 재원도 모두 열악하다. 하지만 난색을 표하는 시장에게 자히아가 열정적으로 호소하는 부분과 대미를 장식하는 어떤 장면이 정확하게 대구를 이룬다.
클래식은 일정한 지식과 교양을 담보해야 소화 가능하리라 단정되곤 한다. '고급 예술'은 감상할 수 있는 눈과 귀를 갖춰야만 한다는 인식 때문에 화석화된다. 침묵 속에서 격식을 갖춘 엘리트 관객이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연주자들을 품평하는 풍경이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공들인 결말은 주인공의 음악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선언하고 증명까지 동시에 해낸다.
물론 기존 클래식 음악인들이라면 고개를 흔들 장면이지만, 연주자와 관객 모두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 '교외지대'에서 스쳐 지나가는 '방리외 영화' 속 등장인물 같은 이들이 클래식에 심취해 귀를 기울이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찰나의 체험이지만, 적어도 그들이 늘 겪는 일상의 가난과 암담한 미래에 한 줄기 틈을 만든 건 틀림없다.
모든 건 그렇게 시작하는 법이다. 이 영화적 선언은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처럼 범죄나 마약에 빠지기 쉬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고전음악 교육을 개방하고, 그 결과 구스타프 두다멜 같은 세계적 지휘자를 발굴한 사례와 고스란히 통한다. 이 주제의식은 현대의 문화예술이 사회적 통합과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가치라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즐거운 음악'이라는 본질 ▲ 영화 <디베르티멘토> 스틸 이미지ⓒ 찬란
영화는 주인공의 실제 성공담을 풀고 싶은 유혹에 직면했을 테다. 하지만 그 영광의 초입에서 딱 멈춘다. 이후 화려한 성공은 그저 자막 몇 줄로 간략하게 끝이다. 관심이 있다면 온라인 검색 조금만 해 보면 잔뜩 실제 일화가 올라오니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대신 긍정적 변화와 성장을 강조한다. 주인공과 여동생, 라신 스쿨의 음악 동료들이 함께 겪는 화학적 변화는 '오케스트라는 하나의 몸'이라는 노스승의 철학을 고스란히 구현한다.
여성 지휘자 '마에스트라'가 세계적으로 6%, 특히 프랑스에선 4%에 불과하다는 언급이 눈에 띄지만, 남성 대 여성 대결 구도로 환원되기보단, 프랑스 내의 다양한 계급차별 속에서 부분으로 드러나는 편이다. 오히려 이민자/교외 출신 vs. 서유럽 백인/시내 출신의 전통적 계급 갈등이 더 부각되면서 대립각을 흥미롭게 만든다.
은사인 '첼리비다케' 캐릭터가 눈에 들어온다. 이 마에스트로는 원래 지독한 여성 혐오로 유명했다. 그런데 말년에 17살 자히아 지우아니를 제자로 받았다. 그를 원래 알던 이들은 진실 여부를 의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줬듯, 실제로도 노쇠한 거장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것처럼 느껴진다. 첼리비다케의 지휘 스타일은 아주 느리게 하나둘 건물을 올리듯 쌓아나가다 막판에 폭발시키는 유형인데, 이 영화의 서사 구현방식과 일맥상통하는 것도 흥미롭다.
자히아는 오케스트라 이름을 묻자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라 답한다. 현악 4중주에서 비롯된 가볍고 유쾌한 음악 양식이다. 그중에도 하이든의 디베르티멘토를 골랐다. 하이든의 것은 각기 다른 방에서 2개의 그룹이 동시 연주하는 형태다. 주인공이 구성한 오케스트라가 바로 두 세계가 어울리는 시공간이다. 평소 길에서도 마주칠 리 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오직 음악으로 어우러지는 현장은 팀의 명칭과 정확하게 합일된다.
사유의 깊이만큼 더 맛깔나는 영화 ▲ 영화 <디베르티멘토> 스틸 이미지ⓒ 찬란
영화는 '개천에서 용 난다' 성공담 전형으로 보일 구석이 다분하다. 초반에는 '네 차례가 나중에 올 테니 기다려라!'나, '네 주제를 좀 알아라!' 모욕에 울컥하며 통렬한 복수극을 기대했지만, 단순한 응징을 넘어 당대 프랑스 내 사회적 대립과 계급 갈등에 대한 (느리지만 정공법인) 해법을 사회통합 염원을 실어 전한다.
이같은 메시지는 언뜻 이상주의나 적당주의로 치부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다면 실패다. 그렇지만 처음엔 의심스럽던 게 조금씩 진심이 이해되면서 큰 그림으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혼자만의 질주가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음악을 통해 하나가 되는 행복의 맛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도 가감 없이 전해진다.
묘하게 시선을 끄는 장면들이 있다. 연습에 영감을 더하려 주인공이 가져온 '카르카부스(금속 캐스터네츠)'의 익살이 영화 속 주인공의 지향을 함축한다. '카르카부스' 도입은 자히아가 봉사활동을 나가던 장애아동들과 교류에서 착안한 것이다. 주인공이 다양한 사회경험을 포기하지 않던 소신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오랜만에 가족에게 돌아와 담소를 나누던 자리에서, 아빠가 브라스 밴드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옛날 노동자들이 퇴근 후 하나씩 악기를 들고 합주한 데서 유래했다는 고사다. 그래서 금관악기나 타악기는 남성들이 전담하게 된 것. 듣고 나니 오랜 관습의 기원이 비로소 명백해진다. 뭐든 출발 당시의 의도와 변화를 함께 고찰해야만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교훈이다.
▲ 영화 <디베르티멘토> 포스터ⓒ 찬란
[작품정보]디베르티멘토 Divertimento
2023 | 프랑스 | 드라마
2024.08.07. 개봉 | 115분 | 12세 관람가
연출 마리-카스티유 망시옹-샤르
출연 울라야 아마라(자히라 역), 리나 엘 아라비(페투마 역),
닐스 아르스트럽(첼리비다케 역), 마랭 샤푸토(딜런 역)
수입/배급 찬란
공동제공 소지섭, 51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