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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2 보고 실망한 당신, 혹시 이런 마음 때문?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10-15
[김성호의 씨네만세 853] 영화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폴리 아 되 스틸컷ⓒ 워너 브라더스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엇갈리는 평가다. 근래 이토록 평단과 관객이, 또 평론가와 평론가 사이에 극단적 엇갈림이 있는 작품이 없었다. <조커: 폴리 아 되> 이야기다.

한국에서만 500만 관객, 전 세계 관객 수 1억 명을 동원한 것으로 평가되는 1편이다. 할리우드 평균 편당 제작비에 미치지 못하는 7000만 달러를 들여 완성한 <조커>는 집계된 것만 10억7400만 달러 수익을 올리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그저 상업적 성취만이 아니다. <배트맨> 시리즈 속 강렬한 캐릭터를 가진 조연이던 '조커'에게 제대로 된 서사까지 입혔단 평가는 꽤나 적절한 것이었다.

베니스영화제 최초로 코믹스 기반 작품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건 극적이란 표현만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평범한 인간에서 조커로 거듭나는 <조커>의 드라마는 코믹스 팬은 물론 깐깐하기 짝이 없는 심사위원단까지 만족시켰다. 후반부 카타르시스는 근래 나온 영화 가운데선 비빌만한 작품이 없다는 평까지 나왔다.

평가 엇갈리는 조커 속편, 어째서?

<행오버> 시리즈 말고는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던 감독 토드 필립스가 일약 명감독 반열에 오른 건 물론이다. 신드롬이라 해도 좋을 인기에 속편 제작 논의가 일었고 호아킨 피닉스에 더해 레이디 가가까지 출연을 확정지으며 성공에 대한 기대를 한껏 키웠다. 제작비는 무려 1억9000만 달러에 달했다. 규모 있는 영화 두 편을 찍을 수 있는 돈이다. 여기까지가 <조커: 폴리 아 되>가 전편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출발한 배경이다.

뚜껑을 연 작품은 기대를 크게 하회했다. 일단 첫 편의 성취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베니스 반응부터가 심각했다. 공개 직후 혼란스럽다거나 지루하다는 비평이 쏟아졌다.

온라인 기반 사이트인 로튼토마토와 IMDb에서도 심각한 수준의 평가가 이뤄졌다. 졸작이나 받을 법한 점수가 매겨진 가운데,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저조한 흥행세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선 스타 비평가 이동진이 호평을 내놨으나 개봉 일주일 동안 겨우 50만 관객만 모았을 뿐이니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해도 좋겠다.

<조커: 폴리 아 되>는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이토록 큰 기대를 완전히 꺾어놓았나. 전편에 격렬히 환호한 관객들조차 등을 돌릴 만큼 졸렬한 영화였는가. 특별히 주목하지 않는 감독 토드 필립스의 영화를 보게 된 건 오로지 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부제인 '폴리 아 되 Folie à deux'가 무슨 뜻인가. 'Folie'는 정신병이고 'deux'는 둘이나 몇몇을 뜻하는 말로, 이를 합쳐 말할 땐 정신장애가 전이되거나 공유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의학용어로 쓰인다고 한다. 전작이 '조커의 탄생'을 이뤘다면 이번 편에선 조커에 더해 할리 퀸의 존재가 더해진다는 점에서 이들 간의 주고받음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이가 많았다.

아서를 파괴하고 조커를 끌어내려는 여인

▲ 조커: 폴리 아 되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영화는 조커, 그러니까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이 생방송에서 진행자를 살해하는 등 연쇄살인 벌인 혐의로 아캄수용소에 갇힌 상태로 시작한다. 전편이 그린 충격적 행각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 아서의 삶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재판을 앞두고 있다곤 하지만 살인의 증거가 확실해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변호사 매리앤(캐서린 키너 분)는 인격장애로 인한 심신미약을 주장해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한다.

교도소에서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군림하는 교도관들은 은근한 폭력으로 아서를 괴롭힌다. 전편 <조커>가 그렸던 부조리한 세상의 축소판이 아캄수용소 안에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을 잠재우는 약을 삼키고 교도소의 일정에 따라 무기력하게 오가는 삶이 꽤나 오래 지속된 듯, 아서에겐 생기가 하나도 없다. 할리를 만나기까지는.

영화는 리 퀸젤(레이디 가가 분)과 아서가 만나는 순간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수용소 정신병동에서 진행되는 노래교실에서 만난 리는 아서에게 남다른 관심을 드러낸다. 집에 불을 질러 수용소에 오게 됐다는 리는 아서의 광팬이다. 그의 영화를 스무 번이나 돌려봤다고 말하고 그와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고도 말한다. 매력적인 여자가 자신에게 호감까지 드러내다니, 다 꺼져가던 아서의 심지에 화륵 불길이 타오른다.

그로부터 영화는 아서의 재판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아서가 조커라는 다른 인격과 분리된 정신병을 앓고 있고 그로 인해 살인에 이르게 됐다는 변호사의 주장은 관철될 수 없게 된다. 아서는 변호사를 해임하고 스스로가 조커,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조커의 분장을 하고 법정에 나서며 특유의 광기어린 쇼맨십으로 상황을 장악한다. 가뜩이나 관심이 큰 아서의 재판이 일약 화제의 중심이 된다.

기대를 외면하고 제 갈 길을 간 조커

아서의 변화엔 스스로가 할리 퀸이라 주장하는 리 퀸젤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아서가 벌인 일에 지대한 관심을 내보이던 그녀가 아서를 자극해 조커적 성향을 끄집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외로운 상태에 있던 아서는 저를 알아주는 여인을 만난 뒤 광적인 열정을 단숨에 회복한다. 그 광기가 주변의 재소자들에게 전염되며 아캄수용소엔 통제하기 어려운 열기가 넘실대기 시작한다. 광기는 그저 수용소 안에만 감도는 것이 아니다. 도시 전체에, 재판이 벌어지는 법원 외부에 조커의 팬들이 찾아와 소요사태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가 리 퀸젤과의 관계 뒤 조커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과정을 인상 깊게 내보인다. 그러나 사건은 그가 원하는 대로만 풀려가지 않는다. 조커가 아서 내부의 인격인가, 아서가 창조한 진화하고 궁극적인 개성인가가 재판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아서 스스로조차 그를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리 퀸젤과 조커의 지지자들, 검사, 수많은 다른 이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펼쳐간다.

<조커: 폴리 아 되>가 전편에 환호한 관객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주요한 이유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서다. 그저 충족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대를 분질러버리고 배신했다 봐도 좋겠다. 이 영화의 요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조커는 사실 조커가 아니었다' 쯤이 될 테니 말이다.

말 그대로 영화는 아서 플렉이 조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재판이 절정에 달할 즈음에 스스로가 조커가 아닌 아서라고 스스로 인정해버리고 만다. 그에 실망한 지지자들이 저를 저버리는 걸 막을 여력조차 없다.

심지어 영화는 아서를 죽여버리기까지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교도관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이코패스가 복도에서 아서를 칼로 찔러 살해하는 것이다. 조커인 줄 알았던 아서는 그렇게 무력하게 아서 플렉으로써 죽는다.

아서는 조커가 아닌 상태로 리 퀸젤을 만나 참담하게 버려진다. 조커거 못된 그는 이름 없는 재소자에게 칼을 맞고 죽는다. 그리고 그를 죽인 재소자가 제 입 양편을 칼로 찢는 장면을 멀찍이 보여주며 엔딩크레디트를 올리는 것이다. 너희가 아는 조커는 조커가 아니었다. 그저 아서 플렉이란 인물일 뿐이다. 그를 관객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서에게서 조커만 바라보는 건

▲ 조커: 폴리 아 되 스틸컷ⓒ 워너 브라더스
'폴리 아 되'라는 부제는 여기서 한층 의미를 발한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이들 간에 전염되는 정신병증, 혹은 망상을 뜻하는 이 말이 그저 리 퀸젤과 아서, 나아가 수용소며 법원 안팎의 이들 사이에 발현되고 폭증한 조커적 현상만을 가리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며 조커가 조커라 확신했던 많은 이들이 있다. 그 관객들이 전편에 환호하고 이번 속편에 비난을 쏟아내는 주요한 축이라 해도 좋다. 이들은 아서가 파격적 살인행각을 벌이는 모습과 전편 결말부의 폭동으로부터 어떠한 카타르시스를 맛봤다. 그것이 전편을 세계적 성공작으로 만든 주요한 요인이다.

영화 속 조커에 환호하는 이들과 이 관객들은 얼마 다르지 않은 감정을 경험한다. 아서가 조커가 아니란 사실이 드러날수록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낀다. 영화가 마침내 조커가 아닌 아서의 이야기란 게 확인될 즈음 그 실망은 정점에 이른다.

아서가 조커이길 바란 건 아서가 아니다. 리 퀸젤을 위시한 조커의 극렬 지지자들이다. 그들은 아서로부터 저들이 보길 원한 조커만을 본다. 조커가 제 기대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눈 앞의 아서를 보려 하지 않는다. 아서가 아닌 조커이길 원한다.

<조커: 폴리 아 되>가 그 조커를 죽였으므로 그와 같은 관객은 영화에 반감을 표한다. 아서가 아닌 조커만을 보고, 조커가 아닌 아서임이 드러나자 등을 돌리는 이들과 얼마 다르지 않다. 아서가 간절히 원한 대화 대신 노래를 멈추지 않던 리 퀸젤처럼 저의 욕구만을 충족하려 든다. 그것이 실체를 외면하고 저 자신의 욕구에만 집중하는 집단적 망상증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토드 필립스가 '폴리 아 되'란 부제로 지칭한 것은 그저 영화 속 리 퀸젤과의 관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닐지 모른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 또한 그와 같은 양태를 보이니까 말이다.

영화의 아쉬운 전개, 초점 없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이야기, 뮤지컬적 요소의 어울리지 않는 반영에도 불구하고 <조커: 폴리 아 되>가 가진 매력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고 여긴다. 감독은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닌 영화 바깥의 관객을 겨냥하려 든다. 그 의도가 전적으로 먹혀들진 않았을지라도, 탄환이 완전히 빗겨나갔다고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제법 특별하지 않은가. 고담의 악당 할리 퀸과 조커가 등장하기까지 한 톨의 밀알이 됐던 아서 플렉의 삶이 또한 그러했듯.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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