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경기를 보고 있으면 깜짝깜짝 놀란다. 도대체 미국은 얼마나 잘살기에, 운동선수에게 저렇게나 큰돈을 줄 수 있단 말인가. 투수, 타자 다 잘해서 연봉이 980억원(7천만달러)이나 된다는 오타니만 고액 연봉자이겠는가. 1년에 400억~500억원 정도를 받는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한국에서 야구로 돈을 제일 많이 번다는 최정 선수가 14년간 받는 총액이 302억원임을 생각한다면 미국은 어떤 나라인지 가늠이 안된다. 농구와 미식축구는 더하다. 1년에 162게임이나 하는 야구와 달리 정규리그가 82경기인 미국프로농구(NBA)와 고작(?) 17경기인 내셔널 풋볼 리그(NFL)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최고 연봉은 700억~800억원 수준이다. 그런 부자 나라 미국에,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지 미국과 빈곤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면서도 양극화의 교본 같기도 하다. 매슈 데즈먼드 프린스턴대학교 사회학 교수는 저서 <미국이 만든 가난: 가장 부유한 국가에 존재하는 빈곤의 진실>에서 미국인 18명 중 1명이 빈곤선의 절반 이하 소득으로 살아가는 지독한 빈곤(deep poverty)의 상태임을 꼬집는다. 지독한 빈곤은, 빈곤선 소득 기준의 절반의 상태니 말 그대로 최악이고 그 직전의 상태인 빈곤층과 이 빈곤층의 경계선에 있는 저소득자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 가난은 여러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특히 오피오이드 사태(최근 20여년 사이에 마약성진통제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한 사건)는 미국인들의 진통제를 선호하는 기질이 있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일을 해야만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이들은 빨리 통증을 줄여주는 약을 찾게 되고 이런 심리를 제약 회사가 악용해 의사에게 처방을 강요하면서 참사로 이어졌다.
가난하니 별의별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별일을 다 해야 하고 별 유혹에 다 넘어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별별’에만 꽂혀 왈가왈부한다. 특히 미국처럼 극과 극이 선명해 한쪽은 열심히 살아서 보상받는 거고, 한쪽은 게을러서 벌받는 거라는 추임새가 많은 곳에선 이 별별은 가난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쉽게 규정되어 ‘저렇게 사니 저 모양’이라는 확증편향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할수록 저런 삶의 구렁텅이는 더 깊어진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안타까운 선택들이 이어지는데, 이를테면 성을 판매하는 것도 그 연장선과 무관치 않다. 세상의 음지는 이 악순환이 몇 바퀴나 선순환해서 굳어진 것이다. 이즈음에 이르면 현상의 사회구조적 모순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사람들에게 음지는 그냥 음지일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그냥 타락했을 뿐이다.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자는 그냥 ‘걸레’라 불리는 거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이 모욕적 호명의 두께만큼 인물의 서사는 얄팍해진다. 사람들은 걸레가 걸레가 되기 전에 무엇이었는지 관심이 없다.
숀 베이커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숀 베이커 감독이 노련한 이유다. 애써 음지의 서사를 복원하지 않는다. 교훈적인 상황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주제를 장악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미국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디즈니랜드 바로 앞 모텔에 살면서 성매매에 절도까지 서슴지 않는 철없는 엄마와 철들기에는 너무 어린 딸의 별의별 모습이 별다른 복선 없이 전개된다. 도무지 영화적 장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흐름 위에서 부자 나라 미국에 존재하는 가난의 결을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한다. 영화에서, 영화스러운 클로즈업과 영화음악다운 효과음은 끝나기 1분 전에 등장한다. 엄마와 떨어져 보호 가정으로 끌려가게 된 아이는 역시 모텔에서 살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 오열하는데 이때 영화는 클로즈업을 사용해 가난의 본질이 얼마나 무섭고 서러운 것인지 강조한다. 그리고 친구는 떠날 친구의 손을 붙들고 지금껏 그림의 떡이었던 디즈니랜드로 달리는데, 영화음악다운 경쾌한 효과음은 이때서야 등장한다. 1분 남짓한 엔딩 장면에서의 억지 유쾌함은, 어떤 환경에선 아이들이 아이들스러운 것도 영화 같은 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서사를 만들어낼 일말의 힘도 기대도 없는 삶, 그게 가난한 본질이다.
<아노라>는 반대의 방법으로 관객을 장악한다. 영화는 엔딩 1분 전까지 모든 장면이 영화적 장치로 구성된다. 오프닝의 적나라함은 스트리퍼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전개는 빨라도 너무 빠르다. 돈이 전부인 재벌 2세가 등장하고 그는 주인공 애니(마이키 매디슨)를 일주일간 돈으로 사고 그 일주일간 돈을 펑펑 쓰면서 섹스를 즐기다가 갑자기 결혼하자고 한다. 애니는 약간 의심하지만 행운이라 여기고 받아들인다. 다음은 이 결혼을 무효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은 재벌의 하수인들이 등장해 서로 우당탕탕하는 에피소드가 빠르게 전개된다. 애니는 남자의 부모로부터 온갖 모욕을 들어가며 무효 서류에 서명을 하지만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한다. 여기까지 배경음악의 템포도 (시종일관 지나치게 영화적이라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등장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엔딩 타이밍에서, 모든 영화적 상상력은 제거된다.
신데렐라의 꿈에 젖었다가 다시 원래의 철교 옆 집으로 돌아온 애니는 하수인 이고르가, 뺏겼던 다이아몬드 결혼반지를 몰래 챙겨주자 갑자기 차 안에서 성관계를 하려고 한다. 일종의 직업적 본능이었을 것이다. 애니에게는 그게 감사의 인사이고, 보답 행위이자, 시장 논리였으니 말이다. 그러다 애니는 기괴한 행동을 하는 자신에 의해 오열하고 영화는 자동차 와이퍼 소리만 오랫동안 들려준다. 애니는, 그래서 자신을 본명인 아노라로 부르지 않았다. 아노라의 뜻은 ‘석류’, ‘빛’, ‘밝다’인데 이는 자신의 삶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현실적 키워드이다. 감독은 엔딩을 통해 음지에 사는 이들에게는 음지가 서사의 전부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누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느냐?’는 고리타분한 현자적 물음을 건네는 대신, ‘돌에 맞으면 사람은 아프다’는 원초적인 사실만을 남겨둔다. 그 돌, 당신은 안 들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노라>는 인간의 처참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회구조의 포악함을 억지로 나열하지 않는다. 그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을 찾아내 희망을 전시하는 관성도 거부한다. 그보다는 오래 지속되어 온 미국의 이면을 진솔하게 드러내면서 손가락질만으로는 이 문제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성매매의 윤리적 논쟁에서 사창가의 역사와 수요와 공급 법칙을 들먹이며 법으로 막을 문제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막상 성 노동을 (제도적이든, 인식적이든) 양지로 끌어올리려고 하면 “그런 일이 떳떳해서야 되겠냐”며 부정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성 구매는 괜찮지만, 성 판매는 ‘맞아도 싼 일’인 공간에서 '빛'을 찾아 나설 아노라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