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 422]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체화> 외 1편▲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체화>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01.<체화>
한국 / 2024 / 극영화
감독 : 홍승기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여. 그리고 피워 내 너의 꽃을"
해를 바라보고 운동장 한 가운데에만 서 있는, 밥도 먹지 않고 물만 마시는 학생이 있다. 전학생 다빈(조단 분)이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다. 물을 그렇게 마시는데도 화장실 한번 가는 법이 없고, 뭘 숨겨두기라도 했는지 점심시간만 되면 뒷산에 있는 터널로 향하곤 한다.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여름인데도 뜨거운 햇볕만 쬐고. 심지어 몸에서는 꽃향기까지 난다. 지금 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학교에 다닌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그를 친구들은 점점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중심에 놓인 인물 다빈은 영화의 초반부 설명만으로는 사람보다 식물에 가깝다. 성장을 위해 광합성이 필요한, 광합성을 하기 위해 햇빛과 물이 필요한 생물. 그런 그를 두고 친구들이 이상하게 느끼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엄마는 다들 반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고, 자신조차 사람들로부터 먼 곳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같은 반 친구이자 짝인 선화(장지유 분)에 의해 온몸이 꽃으로 뒤덮인 다빈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던 날, 소문을 들은 아이들은 다빈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의 표면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황은 상상에 기대 완성된 식물 인간 다빈이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은 현실과 그리 멀지 않다. 특이하게 받아들여지는 대상이 경험해야 하는 은둔과 회피의 시간. 그리고 폭력이다. 홍승기 감독은 감독 노트를 통해 이 작품을 '저마다 자신의 꽃을 피워 다채로운 꽃밭이 된 세상을 꿈꿨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 과정마저 예쁘고 사랑스럽게 그리지는 않는다. 문제적 현실에 대한 의식이 분명히 깔려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다른 아이들의 급식에 자신의 꽃가루와 씨앗을 퍼뜨리는 다빈의 행동은 자신의 처지를 직접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이해시키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이들의 몸에서도 꽃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자를래야 자를 수 없고, 그대로 두자니 체화가 되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장면으로부터 극의 타이틀인 '체화(體化)'의 의미가 두드러진다. 극 중 설정인 사람이 꽃이 되는, 특정 물체로 변화한다는 의미의 체화와 더불어, 다른 사상이 몸에 배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의미 모두다.
괴롭힘을 주동하던 일홍(유지완 분)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가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처벌을 시도하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진 의외의 모습이다. 모두가 꽃을 피운다는 목적에서는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어떤 방식'으로 꽃이 되는가 하는 부분에 있어 정확한 구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다만, 어린 아이들이 모두 함께 꽃이 된다는 의미는 처벌로서 낙인을 찍겠다는 의미가 아닌, 다시 태어나는, 회복으로의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홀로 운동장에 서 있던 다빈의 모습과 모두 함께 들판에 누워 꽃이 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정확히 대비된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어떤 장면 위에 서 있을까?
▲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상담원 범유석>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02.<상담원 범유석>
한국 / 2024 / 극영화
감독 : 박아름
박아름 감독의 <상담원 범유석>은 일인극의 형태에 가까운 형식을 가진 흥미로운 작품이다. 범유석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고객 상담원(최지안 분)이 친한 친구(최혜민 분)와의 통화만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런닝타임 내내 프레임을 채우는 것은 그의 모습뿐. 관객들은 대화 내용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추측하고 이야기의 퍼즐을 맞춰가야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중심 인물이 상담원으로 설정되어 있으면서도 극 전반에서 그가 상담원의 자리에 놓이는 경우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감독은 이에 대해, '친절함'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직업이 상담원이었다며 그 이면적인 모습을 담기 위해 설정했다고 말한다. 직업이 가진 이면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작년 이맘때였나? 내가 사람을 죽여서 산에다 묻었거든"
두 사람의 대화는 상담원 유석의 VIP 고객이자 동창이었던 인물(박아름 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돈 많은 친구 하나 정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서로 개인 번호도 주고 받고 속 깊은 이야기도 주고 받았다는 유석은 그 과정에서 그가 살인 고백을 해왔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장난인줄만 알았던 고백은 확인 결과 진짜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설치하고 사건을 수사 중인 실제였고, 유석은 현장에서 의심까지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상한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오늘 주문해놓고 새벽까지 갖다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상담을 하는 고객 중에 워낙 정신 나간 사람이 많아서 그로서는 조금도 믿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석은 VIP 사은품으로 나오는 비싼 명품 스카프를 자신이 대신 받기로 하며 지금 살고 있는 집주소까지 그에게 넘긴 상태다.
지금까지 나열한 여러 요소들이 극의 서스펜스를 만들고 유지한다.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점점 당황스러워 하는 인물과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급박한 전환으로 그 모습을 담아내는 카메라. 수화 너머에서 종종 이야기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친구의 대답과 여전히 알 수 없는 VIP 동창의 정체와 그에게 넘긴 자신의 개인 정보까지. 영화는 마지막에서 이렇게 순서없이 급하게 쌓아올린 모든 레이어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폭발시키는 데 성공한다.
보이지 않는 것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을 끊임없이 상대해야 하고, 불특정 다수 앞에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드러내야 하는 전화 상담원의 모습을 하나의 사건 위로 드러내는 방식이 일면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지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 했던 직업이 가진 이면의 모습이다. 영화 <상담원 범유석>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기울어진 상태만으로 충분한 위협에 노출될 수 있는 어떤 직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