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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패망 후 급변한 일본 사회의 초상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10-21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동경의 황혼>일본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고전 3대 거장 혹은 4대 거장에 대한 지식 자랑은 드문 일이 아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같은 이름은 세계적 명성과 함께 각자 고유의 색채로 영역을 나누며 세기를 초월해 여전히 애호되는 중이다. 그중 오즈 야스지로의 이름은 거의 이견이 없는 정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런 오즈 야스지로의 수많은 영화 목록 중에도 맨 위에 놓이는 <동경 이야기>가 요즘 국내 극장가에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인 명작 재개봉 열풍을 타고 오랜만에 스크린에 걸렸다. 많은 미디어가 이를 언급하고 주목했다. 하지만 <동경 이야기> 재개봉에는 슬그머니 따라붙은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역시 도쿄를 배경으로 한 후속작 <동경의 황혼>이다. 이 작품은 공식적으로 첫 개봉이기도 하다. 하지만 익숙한 <동경 이야기>에 비해 <동경의 황혼>은 최초 정식 공개임에도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덜한 편이다. 그러나 두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포착한다면, 어쩌면 더 집중적으로 소개해 마땅할 기운을 이 영화가 가득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 "동경의 황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엣나인필름
바람 잘 날 없는 스기야마 씨네 사정

1950년대 중반 동경의 겨울 어느 날, 영화가 시작된다. 은행의 중역 스기야마 씨 가족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제각기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스기야마 씨에겐 두 딸이 있다. 큰딸 타카코는 문학 교수이자 번역가인 누마타와 결혼해 딸 미치코를 낳았다. 작은딸 아키코는 아직 결혼하지 않고 스기야마 씨와 한집에서 산다. 아키코는 대학을 중퇴하고 속기사 과정을 배우는 중이라 하지만, 취업이나 결혼이나 양쪽 모두 크게 집중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특이하게 '아내'이자 '엄마'의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스기야마 씨가 퇴근하자 타카코가 아버지를 맞이한다. 외손녀 미치코도 집에 와 있다. 인사를 받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큰딸은 당분간 누마타에게 돌아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기를 청한다.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근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자주 화를 내는 남편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를 허락하고, 사위를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아키코는 자주 외출해 늦게 돌아오기 일쑤다. 가족과 친척들은 이를 근심하며 좋은 혼처를 물색하는 중이다. 하지만 정작 아키코는 뭔가에 홀린 듯 방황한다. 그는 '겐조'란 남자를 찾아 동경의 거리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지만, 상대는 통 나타나지 않는다. 아키코가 이르는 곳마다 겐조와 아키코의 관계를 아는 이들은 숙덕거리며 도움을 줄 생각은 통 보이지 않는 대신, 아키코를 비아냥거리며 가십 거리로만 삼는다.

실은 아키코는 겐조와의 사이에서 혼전 임신을 한 상황이다. 덜컥 겁이 난 그는 겐조와 상의하려 하지만, 대학생 한량 겐조는 아무래도 일부러 골칫거리를 회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키코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가족 몰래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기저기 자금을 빌리러 다니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처럼 멀지 않아 스기야마에게 소문이 들려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가족은 얼른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면 해결되리라 기대할 따름이다.

겐조를 찾아 그가 들를 곳을 헤집고 다니던 아키코는 자신은 물론 가족과 잘 안다며 옛날 이웃이라 밝히는 중년 여성을 만난다. 하지만 작은 도박장 안주인이 이웃일 리 없다며 이상하게 여길 뿐이다. 아키코는 그 여자가 말하는 고향에서 유년 시절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현재 마음 한구석 공허함의 근원이기도 하다. 여자는 이후로도 스기야마 가족과 계속 엇갈린다.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급변하는 일본 사회와 가족의 초상

▲ "동경의 황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엣나인필름
<동경 이야기>에선 아버지 & 친자식보다 더 친밀하게 교감하는 며느리 역할을 맡았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양대 페르소나 류 치슈와 하라 세츠코는 <동경의 황혼>에선 아버지와 출가한 큰딸로 재회한다. 그래서 공간적 배경과 함께 가족 내 친밀함과 이해도 면에서도 자연스럽게 겹쳐 보이는 효과가 난다.

여기에 시대 흐름과 함께 자유분방함을 추구하지만, 속내는 예전 가족처럼 눈빛만 봐도 모든 걸 포착하는 전통적 유대감의 공백으로 허무함 가득 품은 작은딸 아키코가 가세한다. 그리고 부재로 인해 관객이 수수께끼 풀이에 나서게 만드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서 연상되는 가족의 실내 장면과 대화 vs 아키코가 거리를 방황하며 마주치는 낯선 타인 및 공간이 대비된다. 이런 개성은 자연스럽게 세태 변화로 인한 전통적 일본 가족 형태 붕괴를 떠올리게 만든다. 맥아더 군정 이후 광범위하게 승리자의 선진 문물과 문화가 스며들면서 서구 사회가 겪은 개인주의와 대도시의 인간 소외 역시 뒤늦게 들이닥친 것이다.

시대적 배경은 특히 아키코의 방황 장면에서 마치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음울하고 차가운 슬픔 가득한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아키코는 '신여성' 전형처럼 형상화된다. 전통적 현모양처를 추구하는 언니 타카코와 달리 멋을 부리며 집보다는 대도시의 문화생활에 친근하다. 카페나 바, 라멘 가게 등을 거리낌 없이 누빈다. 사내들의 추근거림에도 대차게 맞서고 흡연도 자연스럽다. 양갓집 규수지만 그런 배경을 모르는 취한 남자들에게 아키코는 종종 화류계 여성 취급을 받을 정도다.

하지만 아키코는 자신이 고집해 쟁취한 현재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어머니의 부재를 아버지와 언니가 열심히 메웠지만, 아키코에겐 유년기 따스한 기억이 부재하다. 물질적으로나 다른 가족들의 의무감으로나 겉으론 결핍이랄 게 없는데도 마음 한구석 불안과 의심이 늘 잠재해 있다. 그런 갈증이 끊임없이 아키코를 내몰고 솔직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그는 '다시 시작하고 싶어. 처음부터 다시'라며 되뇌지만, 한 번 잘못 든 대도시 뒷골목 미로는 아키코의 새 출발을 번번이 훼방 놓는다.

'일본적' 전통의 쇠락을 받아들이다

▲ "동경의 황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엣나인필름
기본 맥락만 놓고 본다면, <동경의 황혼>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지향을 가진 작품이다. 하지만 이미 전작 <동경 이야기>에서도 어쩔 수 없다지만 시대 변화와 기성세대 퇴장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오즈는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전후 일본의 급변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묘사하는 데 전력한다. 그렇게 일관된 균형감을 유지하기에 두 눈 집중해서 관찰하는 것만으로 많은 걸 포착할 수 있다.

큰 소리 내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가족을 책임지는 데 평생 다해온 류 치슈의 아버지 역할은 배우가 왜 일본 '국민 아버지'로 불리는지 명불허전 증명한다. 하지만 전작에선 점잖은 면모 뒤에 과거 음주 문제로 속을 꽤 썩였다는 걸 은연중에 흘린다. 본작에선 틈만 나면 파칭고 가게 출입하는 파격도 선보인다. 별 탈 없어 보이는 과거사 묘사에서 은행 중역으로 비서와 사환을 부리는 스기야마가 경성(서울)에 장기 파견 나간 적이 있다는 게 드러난다. 식민지 근무는 가정사의 비극도 불렀지만, 그저 호인으로만 여겨지는 그 역시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일부였다는 걸 한국 관객에게 환기하는 셈이다.

스기야마와 지인들 대화에선 자연스럽게 과거 추억담이 오간다. 지인 중 누구는 전쟁포로로 오랜 수용소 노역에 시달리다 간신히 귀국했고, 상당수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 새 삶의 터전을 고민하면서 홋카이도는 만주나 연해주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는 농담은 한국과 일본 관객에게 절반은 공유, 나머지 절반은 상반된 감각으로 다가올 테다. 긍정적이지만 않은 구질서가 무너져내린 자리에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쏟아져 심야의 클럽에선 재즈와 양주, 양담배가 흐드러지고, 풍기단속에 나선 경찰도 세상이 이상하게 변했다며 자조할 정도다.

반면 스기야마가 스스로 세운 원칙에 따라 퇴근 후에만 즐기는 음주는 감독 특유의 '다다미 쇼트'에 이어 정갈한 구도와 정돈된 태도로 그려지지만, 어쩐지 힘이 없고 쓸쓸하다. 정종을 기울이며 조곤조곤 이어지는 대화 속에 툭 튀어나오는 폭로, 불길한 전조들은 눈부신 도시의 혼란에 익숙하던 모든 게 밀려나는 암시다. 아키코가 거리를 헤맬 때 횡단하는 어지러운 건널목과 교차로 역시 시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좋건 싫건 변화의 파도는 거스를 수 없다. 그저 품위 있게 수용할 뿐이다.

거장의 일단락을 짓는 계기로서의 영화

▲ "동경의 황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엣나인필름
<동경의 황혼>은 20세기 초 무성영화로 경력을 출발한 감독이 유성영화를 받아들이고도 고수해온 마지막 흑백영화이기도 하다. 1951년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가 완성되었으니 무려 7년을 총천연색 신세계로 진입하지 않고 버틴 셈이다. 하지만 영화계 변화는 어쩔 도리가 없다. 감독의 차분한 표정을 떠올리면, 마치 영화 속 류 치슈의 아버지 캐릭터가 꺼내지 못하는 속내가 연상될 지경이다.

작은딸의 폭주, 잊고 살고자 진력했던 상처가 소환되는 악몽 속에도 스기야마와 타카코는 품위를 잃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런 분투가 관객에게 시대를 초월한 가족에 대한 감정을 소환하고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과 이별을 곱씹게 인도한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를 처음 보고 저게 뭐가 대단하다고 난리인지 의문을 품던 이들이 두 번 세 번 접하다 푹 빠지는 경우가 딱 그 교감의 현장이다.

인물들은 과거 상처가 영화 속 겨울의 한기와 만나 덧나듯 고통을 겪는다. 변화는 언제건 그들을 덮칠 테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결말에서 늘 그랬듯 다시 겨울 끝자락에서 서류 가방 들고 출근하는 스기야마의 뒷모습, 결의를 다지는 타카코의 슬픔과 미소가 뒤엉킨 표정은 감독의 평생 일관된 영화 속 우주와 함께 이에 닥친 도전, 그리고 완고함만으로 더 버틸 수 없음을 인정하는 통찰을 통째 압축한 결정체처럼 다가온다. <동경 이야기>를 봤다면 꼭 <동경의 황혼> 역시 체험하길 권한다.

<작품정보>

동경의 황혼
Tokyo Twilight
1957 일본 드라마
2024.10.09. 개봉 141분 15세 관람가
감독 오즈 야스지로
출연 하라 세츠코, 아리마 이네코, 류 치슈, 야마다 이스즈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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