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씨네만세 872]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한 개인의 성격은 자신이 지내 온 어린 시절의 결과이며, 사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하나의 아이디어를 반복해서 계속 재탕하며 평생을 보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고, 예술가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결국 마지막에는 똑같은 집착을 조금 다른 각도로 접근한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꽤 화나는 일이다. 누구나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결코 끝나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풀어야 할 저주인 셈이다. -로랑 티라르,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 세계 애니메이션 업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사다. 세계를 선도하던 미국 애니가 주춤한 1990년대, 지브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애니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냈다. 1980년대에 나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가 연달아 큰 성공을 거둔 걸 시작으로, 1990년대 들어 <붉은 돼지> <귀를 기울이면> <모노노케 히메>로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2000년대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마루 밑 아리에티>로 정점을 찍었다.
단순히 작화에 그치지 않고 기획부터 각본을 쓰고 디자인과 연출에 이르기까지 작품에 총체적으로 영향을 주는 독보적 역량을 갖췄다.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거장이란 표현이 잘 어울리는 애니 작가가 따로 없을 정도다.
그의 뛰어남은 그저 작품의 완성도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초기작부터 꾸준히 이어진 작품세계, 그 안에 일관된 주제의식이 평화와 반전을 선명히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 달라이 라마 등의 수상자를 배출하며 평화와 관련해 아시아 최고 권위를 갖는 막사이사이상 올해 수상자로 그가 선정된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포스터ⓒ 메가박스중앙
치열하게 쌓아올린 거장의 세계몇 차례 은퇴를 언급하고 다시 번복한 이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하야오는 이제 현업을 떠난 창작자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다시는 그가 만든 작품을 마주할 수 없게 되었단 뜻이다. 은퇴를 예고하고 총력을 기울여 제작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바로 지난해 발표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다. 의미심장한 제목부터가 화제를 뿌린 이 영화는 꾸준히 이어져온 미야자키의 세계관과 주제의식이 총망라된 인상적 작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영화 곳곳엔 지난 시간 미야자키가 구축해온 설정이며 캐릭터, 이야기가 녹아 있다. 타락에 저항하는 성장하는 주인공은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는 2차대전,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있는 일본의 시골마을이다. 본래 도시에 살던 주인공 마키 마히토는 어느 날 밤 미군 폭격으로 병원이 불타는 과정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엄마를 잃는다. 아버지는 도시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꼭 빼닮은 이모 나츠코와 결혼하고, 전쟁무기를 생산하는 군수업체를 운영한다. 마히토도 아버지를 따라 시골로 내려오게 되는데, 뒤바뀐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학교에선 친구와 싸우고 스스로 머리에 상처를 낸 뒤 그를 곤혹스럽게 한다. 비겁하고 치사하게 보이는 행동을 거리낌 없는 하는 그의 모습은 미야자키의 전작 속 주인공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몸이 약한 새어머니 대신 마히토를 돌보는 건 저택에서 오래 살아온 일곱 노파다. 친구 하나 없는 시골에서 좀처럼 집에 마음 붙이지 못하는 마히토의 일상 가운데, 조금씩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말 하는 새, 어느 왜가리가 수시로 찾아오는 건 그 시작. 영화는 비로소 현실 가운데 환상적인 세계를 들여놓는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메가박스중앙
다짜고짜 닥쳐오는 환상적 세계영화는 마히토에게 벌어진 신비한 경험을 중심으로 한다. 저택 근처엔 큰할아버지가 지었다는 거대한 탑이 하나 놓여 있다. 마히토는 갑자기 나타난 말하는 왜가리에게 새어머니를 납치당한 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이 탑으로 향한다. 새어머니를 납치한 왜가리가 탑 안으로 도망간 때문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통상의 만화, 또 동화에서 발견되는 흔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상과 신비한 세계를 잇는 통로가 있고, 주인공은 그를 지나 새로운 경험을 한 뒤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오즈의 마법사>에선 회오리바람이 그러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선 토끼굴이 또 그랬다. <해리포터>엔 9와4분의3 승강장이 있고, <나니아 연대기>엔 다락에 놓인 옷장이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건 바로 탑인데, 주인공을 그로 인도하는 건 사람의 말을 하는 왜가리가 되겠다.
일상 가운데 환상을 들여놓는 구성은 미야자키가 평생에 걸쳐 천착해온 애니의 이상적 형태라 해도 좋다. 이 팍팍한 세상, 지루한 일상엔 숨 쉴 구멍이란 게 필요하고, 인간의 이성이며 이해가 닿지 않는 환상의 세계가 그 답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그로부터 풀어내려는 이야기, 환상을 지나 다시 돌아올 일상 가운데 어떤 특별함을 이룰 것이냐다. 환상의 세계로 건너가 가져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메가박스중앙
난해함 가운데도 선명하게 드러나는<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난해한 영화다. 탑 안에 있는 세계는 어떤 이성도 통하지 않는 독특한 공간이다. 새들이 사람처럼 움직이며 말을 하고 깃털을 빼앗긴 왜가리가 사람의 형상을 한다. 바닥은 젤리처럼 움직이며 주인공을 집어삼킨다. 탑 아래 세상엔 커다란 바다가 있고, 그 바다엔 물고기가 얼마 되지 않는다. 펠리컨들은 아무 거나 삼키려고 들고, 앵무새는 국가를 건설하려 한다. 그들의 관심 너머엔 실제 세상으로 보내질 인간을 빚고 지켜내려는 이들도 있다. 이 무수히 난해한 설정이 무엇을 위함인지 명확히 짚어내긴 쉽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 든 외부의 인간이 있고, 탑 안의 불가해한 것들은 마치 그 내면의 무의식처럼 작동하고 기능한단 점이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온다. 탑 안에서 마히토의 과제는 새어머니인 나츠코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탑 바깥의 일상적 세계에서 새어머니 나츠코를 위협하는 건 본인 그 자신이다. 언니의 남편과 결합한 나츠코는 그의 아이까지 가져버렸고, 적자인 마히토로부터 저를 제대로 이해받지도 못한다. 어머니로 불리지 못하고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존중만 얻을 뿐이다. 그건 그대로 거부와 같다.
제가 품은 아이를 예정보다 빨리 낳으려 탑 안의 산실에 틀어박혔단 건 반대로 말하자면 아이를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는 의지나 다름없다. 그녀가 든 산실을 침범해선 안 된다는 규약을 어기고서 나츠코를 끄집어내려 들어선 마히토다. 그곳에서 그는 마침내 나츠코를 '어머니'라 부른다. 이는 그녀가 밴 아이를 제 동생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마히토가 비로소 저를 둘러싼 세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를 둘러싼 감정,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제 멋대로 굴고픈 아이 같은 마음은 마침내 고개를 숙인다.
그럼에도 앵무새 군단은 오로지 산실을 침범했다는 이유만을 들어 마히토를 뒤쫓는다. 펠리컨은 무작정 마히토를 삼키려 하고, 왜가리는 곁에서 마히토를 돕는 듯하지만 언제든 배신할 준비도 되어 있다. 앵무새는 꽉 막힌 이성처럼 답답하기만 하고, 펠리컨은 이성이 결여된 채 요구만 가득한 무의식처럼 답이 없다. 신용할 수 없는 왜가리까지 곁에 두고서 마히토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츠코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제가 가진 모든 불만과 불안을 내려놓고서 솔직하게 그녀를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메가박스중앙
화해와 평화, 그가 그토록 천착해온 것탑에 들어서기 전엔 제 아집에 갇혀 나츠코를 외면하고 상처를 주려 했던 그다. 나츠코 또한 그와 같아서 제 아이를 해하려 들고 당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탑에서의 모험이 끝난 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지켜내는 존재가 된다. 앵무새와 펠리컨, 왜가리까지 모든 새들은 모험이 끝난 뒤엔 그저 새일 뿐이다.
미야자키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그간 지속해온 이야기를 보다 심도 있게 파고든다. 원치 않는 세상이 실존한다 하더라도 그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내는 인물을 통하여 제가 세상과 삶을 대하는 자세를 풀어내려 한다. 때로는 앵무새와 같이 편협하고, 또 때로는 펠리컨처럼 욕구로만 가득하며, 어느 때는 왜가리처럼 약삭빠르게 행동하려는 것이 인간이다. 앵무새와 펠리컨과 왜가리가 모두 우리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위해 탑을 쌓아가는 과정이 곧 그가 바라본 바람직한 인생이 아닌가.
미야자키는 오랜 시간 천착해온 삶에 대한 관심을 또 다시 저만의 스타일로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난해한 이야기 가운데서도 의식과 무의식, 초자아 따위를 상징한 듯한 설정 속에서 더욱 빛나는 것은 옳은 선택과 태도를 향한 미야자키의 천착이다. 지난 여러 작품 가운데서도 일관됐던 반전과 화해에의 지향이 이번에도 이어지는 건,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더 나은 태도의 결과이기 때문일 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