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의 쇼트폼 영화 관람기] 팝콘 다 먹기도 전에 끝나는 건 신선, 상영관 확대 등 고민 필요▲ 영화관ⓒ 정누리
우리는 몇 년 전만 해도 영화관 스케줄에 맞춰 몸을 움직이곤 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서둘러 밥을 먹고,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고, 팸플릿 속 줄거리도 꼼꼼히 읽는다.
현재에 와서는 영화관이 우리에게 맞추기 시작한다. 가격을 낮추고, 상영시간을 줄이고, 전개속도를 높인다. 도매업이 소매업으로, 이후 1인가구를 겨냥한 시장이 생겨났 듯, 영화관도 쇼트폼 콘텐츠에 익숙한 MZ세대에 맞춰 획기적으로 짧은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것은 바로 '쇼트폼 영화' 얘기다.
지난 1일, 4분 44초짜리 8개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 공포영화 < 4분 44초 >가 개봉했다. 요새 통 영화관을 들르지 않은 나지만, 부담 없는 러닝타임에 끌려 밤늦게 예매해봤다. 나와 같은 MZ세대를 겨냥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MZ세대를 겨냥해 만들었으며, 실제로 전체 관객의 60% 이상이 10~20대라고 한다.
시간이 늦은 탓일까. 이날은 300석 가까운 상영관에 앉은 사람이 친구와 나 둘뿐이다. 덕분에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으스스한 공포 분위기는 충분히 조성됐다. 이 틈을 타 말하자면 난 원래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유의 질질 끄는 플롯을 싫어했다. 2시간 넘게 감독의 밀고 당기기에 놀아나면 기가 쭉 빠지곤 했다. 그나마 40분 정도는 견딜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 영화는 한번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윽고 상영기가 돌아간다. 8개의 작품 중 'ASMR'이라는 이름의 1번째 단편집이 시작됐다. 주인공이 가위에 눌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저러다 말겠지'라는 삐딱한 생각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영화는 완벽히 내 예상을 빗나갔다. 주인공은 설명도 없이 사고를 당하고 만다. 목숨이라는 것은 전후 예고 없이 사라진다. 재앙은 자연재해처럼 서사도 없이 찾아온다. 온몸이 오소소 떨렸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릴러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봤을 때의 무자비함을 동일하게 느꼈다.
결말은 너무나 아쉬웠다. 1편부터 7편까지는 연결성이 좋았다. 쇼트폼 영화라 해서 단발성 에피소드일 줄 알았는데, 모든 이야기들이 북촌아파트라는 공통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덕분에 4분이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갈수록 기대감이 높아졌다. 하지만 층층이 쌓이던 서사가 마무리에서 뚝 끊겨버렸다.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결말에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짧다는 말이 작품성에서 타협을 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차라리 단편 개수를 늘리더라도 마무리를 제대로 지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쇼트폼 영화라 해도 풍성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는 정도로 이번 작품은 평가를 마쳐야 할 듯하다.
스마트폰이 줄 수 없는 매력, 보편적으로 자리 잡으려면 ▲ 영화 <4분 44초> 공식 포스터ⓒ 영화사 궁
작품성 자체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으나 쇼트폼 형식 자체가 주는 매력은 굉장했다. 대형 스크린의 강점은 살리고 긴 러닝타임의 부담감은 줄였다. 스마트폰으로 봤다면 이 정도로 강렬하진 않았을 작품도 대형 상영관에서는 꽤나 임팩트를 준다. 커다란 스피커와 공간감이 한몫 한다.
우린 종종 지인에게 영화를 소개할 때 "이건 꼭 영화관에서 봐야 해"라고 말하곤 한다. 같은 작품이더라도 영화관 스크린, 자동차 극장, 거실 TV, 스마트폰 화면 모두 주는 느낌이 천차만별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쇼트폼 영화, 그 중에도 < 4분 44초 >와 같은 공포 장르는 충분한 수혜를 누릴 수 있을 듯하다.
영화를 다 보기 전까지는 외부와 소통할 수 없다는 것도 뜻밖의 장점이었다. 유튜브로 영상을 볼 땐 자꾸 댓글창에 시선이 간다. 무의식적으로 다수의 감상을 따라가게 된다. 시간별 하이라이트를 적어놓은 댓글을 보면 그 장면만 되감기하다가 흐름을 놓치기도 한다. 쇼트폼 영화는 암흑 속에서 스크린만 바라보니 나의 순수한 감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같이 본 친구와도 집에 가는 내내 이날 본 작품에 대해 떠들었다. 인터넷에 관람객들의 후기를 보고 내가 느낀 것과 전혀 다른 감상평이 남겨져 있어 깜짝 놀라기도 했다.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나누는 것은 내가 문화예술 활동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한동안 잊어버린 토론의 기쁨을 느꼈다.
시간적인 면에도 부담이 적었다. 짧은 1시간이라도 영화관에 다녀온 것은 대단히 풍족한 느낌이었다. 속도감 있는 콘텐츠에 익숙한 MZ세대는 물론이거니와 어린 아이를 돌보느라 긴 영화는 엄두도 못 내는 젊은 부부, 체력적으로 쉽게 지치는 중년들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특히 영화보다 매점이 좋아서 영화관에 오는 친구들이 종종 있는데, 그들에게 이보다 좋은 계기가 없을 듯하다.
다만 팝콘 '대'자를 상영시간 40분 동안 모두 먹기엔 역부족이었다. 쇼트폼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팝콘도 남았는데 영화 한 편 더 보고 가자고 했지만, 다른 쇼트폼 영화 상영작이 없어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 훗날 시장이 커져 짧은 영화 두세 개 정도를 여러 관에서 상영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 영화관 매점 간식ⓒ 정누리
처음으로 쇼트폼 영화를 본 감상을 한 마디로 남기자면 '황당함'이다. 이야기가 후루룩 지나가더니 팝콘을 반도 채 먹기 전에 상영관 불이 켜졌다. 옆에 앉은 친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은 기분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흥미로움이었다.
MZ세대인 나는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슬라이드폰, 터치폰, 스마트폰, 그리고 쇼트폼 플랫폼까지 수없이 변화해온 매체의 형태를. 우리는 빠른 변화의 순간마다 너무나 쉽게 적응해버렸다. 때문에 쇼트폼 영화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기에는 시간이 얼마 안 걸릴 것이다.
다만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끌고 오려면, 웹으로 배포하는 영화나 드라마 이상의 고민이 필요하다. 단 1분 만으로도 인기를 끄는 쇼트폼 동영상들을 보면, 40분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다. 작품성이 보장되는 순간 '쇼트폼 영화'는 언제 탄생했냐는 듯이 익숙한 개념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5분만에 튀겨지는 팝콘처럼, 때론 입안에서 사르륵 녹는 작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