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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뒤처진 것 같은 청춘에게, 이 영화가 건네는 위로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11-22
[김성호의 씨네만세 887] <성적표의 김민영>▲ 성적표의 김민영 스틸컷ⓒ 엣나인필름
친구들을 오랫동안 찾지 않아도 늘 제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으리라 믿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옛 자리에 그대로는 머물지 못하니, 관계는 소원해지고 만남은 기약하기 어렵다. 삶의 어느 단계에서 비슷한 궤도를 돌던 친구들이 서로 멀어지게 되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제가 통제한다고 믿지만, 실은 급류 가운데 뛰어든 개구리꼴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껏해야 몇 번의 발길질 정도가 할 수 있는 고작이면서도 마치 제 운명의 주인인양 떠드는 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지난 몇 년 간 내가 지나온 일들은 나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했다. 가장 단단한 영혼조차 단번에 깨부술 듯했던 경험들과 삶과 죽음에 가까이 다가섰던 순간들이 저와 꼭 닮은 흔적을 내 안에 남기고 간 탓이다.

한국, 또 서울생활이 몇 년 간 단절됐다가 다시 터전으로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친구들은 내 기억 속 모습과 적잖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그러했듯, 다시 돌아온 자리에서 만난 친구들도 저마다의 여정에 한창이었다. 누구는 몰라보게 성숙해지고, 누구는 형편 없이 몰락해 기억 속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언제 이 친구가 이리 멋있어졌나 싶은 만남이 있고, 시시하고 지루해서 한시바삐 뜨고 싶은 자리도 있었다.

말하자면, 세상 가장 가깝다 여긴 친구조차도 어느 순간 완전히 낯선 이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망스러울 수 있겠으나, 삶을 보다 폭넓게 이해한다면 이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이다.

삼행시클럽 친구들과 빛나는 학창시절

<성적표의 김민영>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누구나 겪을 법한 관계의 성장통을 그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삶의 다음 단계로, 또 지방도시에서 서울이며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나이에 겪을 법한 현실적인 감정들을 다룬다.

김민영, 유정희, 최수산나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다. 감수성 가장 예민한 여고생 때 기숙사에서 함께 뒤엉켜 생활했으니 그 우정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겠다. 이들의 관계는 다소 특별한 공통점으로 더욱 긴밀하게 엮인다. 다름 아닌 삼행시클럽이다. 말 그대로 삼행시를 짓는 특별활동 모임인 삼행시클럽을 조직해 서로 운을 띄우고 시를 짓는 것이 이들의 약속된 놀이이자 취미다. 기숙사에 갇혀 학업에 정진하는 와중에 만든 클럽은 이들의 학창시절 무시할 수 없는 기둥이 되어준다.

그래서일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여정을 향해 뿔뿔이 흩어진 와중에도 세 친구는 삼행시클럽을 유지하려 한다. 최수산나는 무려 하버드 대학교 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김민영은 대구대학교에 입학해 역시 타지생활을 시작한다. 대학진학을 않은 주인공 유정희만 고향 충주에 그대로 남았다.

유정희의 꿈은 화가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막연할 뿐, 대학 입학이나 취업 같은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듯하다. 사내라면 군대 입대로 다른 여력이 없겠으나 유정희에겐 막연한 시간이 무더기로 주어질 뿐이다. 그 많은 시간, 감당키 어려운 시간이 도리어 그녀에게 어쩌지 못할 부담으로 작용한다.

부모에게 얹혀살며 밥만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딱히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지만 눈치를 보게 될 밖에 없다. 그리하여 일거리를 구한 것이 지역 테니스클럽 사무를 보는 일이다. 말이 사무지, 회비출납에 더하여 테니스장 자리를 지키고 공을 줍는 등 잡다한 일이 그녀의 역할이다. 매일이 똑같은 일상 가운데 자기계발이며 꿈을 향한 전진 같은 거창한 무엇은 없다시피 하다.

그러던 중 겨우 잡은 일거리마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라지니 유정희의 삶은 불안과 혼돈의 나락에 떨어진다. 그러나 그 또한 말이 불안과 혼돈일 뿐, 세상은 제 삶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소소하기만 한 것이다.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로 인구 85만 명의 충북 제일 도시란 위상이 있다지만 청주에선 그럴듯한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 화가가 되고 싶은 유정희에겐 더욱 그렇다.

고등학교 때라면 절친한 친구들에게 제 사정을 알리고 위안을 받을 수가 있었을 터다. 그러나 각기 미국과 서울로 떠나버린 친구들과 소소한 일상을 나누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미 친구들은 새로운 둥지를 틀고 새 벗들을 사귀었던 것이다. 홀로 고향에 남아 또래 없이 일상을 보내는 백조에게만 그런 관계가 없다.

불안과 혼돈 가운데 놓인 청춘

▲ 성적표의 김민영 스틸컷ⓒ 엣나인필름
정해진 날마다 인터넷 화상채팅으로 삼행시클럽을 유지하는 게 그나마의 주요행사지만 그마저도 삐걱이기 시작한다. 우선 미국에 있는 최수산나와 시간대가 맞지 않고, 김민영 또한 자주 늦고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는 때문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더니 이들의 관계가 꼭 그 짝이 아닌가. 자기주장이 센 편이 아닌 유정희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부담이 쌓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유정희가 김민영의 초대를 받아 방학 중 서울에 가 있는 그녀의 집에 방문하는 이야기를 주요하게 잡아낸다. 초청을 받고 청주에서 유정희가 도착하지만 김민영은 그녀가 안중에도 없다. 그저 자투리 시간 의무방어차 그녀를 불렀을 뿐이란 게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대보다 못한 기말 성적을 정정하는데 온 정신이 가 있고, 유정희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다. 대화는 겉돌기만 하고 은근히 만남을 기대했던 유정희는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그로부터 영화가 일변하는 순간이 있다. 이야말로 <성적표의 김민영>의 유일하고도 분명한 승부수다. 김민영은 직접 교수를 만나 성적을 정정해야 한다며 대구로 떠나고, 유정희는 김민영의 서울집에 홀로 남는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것을 만지던 중 김민영의 일면을 대면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글씨가 적힌 CD엔 미처 유정희가 알지 못했던 김민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모습을 눈 깜빡이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몰두해 보는 유정희의 표정이 진한 곰국 같은 감상을 일으킨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그 장면으로부터 이 영화가 발하려 했던 멋을 알도록 한다. 유정희라는 인간과 김민영이라는 인간, 두 사람의 캐릭터가 그 시작이다. 유정희는 수능시험장에서 제 앞에 앉은 이의 울음에 저도 하나뿐인 시계를 내어주는 이다. 멀리서 친구를 만나러 캐리어 가득 온갖, 이를테면 보드게임이라거나 배드민턴 라켓 같은 것까지 잡다한 물건을 바리바리 챙겨올 만큼 섬세한 이다. 대단한 솜씨는 못된대도 제가 일하는 장소가 삭막하다는 누구의 말을 듣고는 이런저런 물건으로 나름대로 꾸며보는 마음 씀씀이도 가졌다. 주변을 이롭게 하고 정을 베푸는 사람,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런 좋은 이가 바로 유정희란 사람이다.

김민영은 어떤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유정희가 김민영에게 남긴 성적표가 그대로 보여준다. 김민영이 멀리 대구까지 달려가 고치려 들었던 성적표가 아니라, 그녀가 서울에 두고 간 옛 친구가 되어가는 유정희가 남긴 성적표가 이 영화의 제목 '성적표의 김민영' 속 성적표가 된다. 유정희가 바라본 친구 김민영이 어떤 모습인지, 그녀가 이해한 제 친구의 여러 면면이 세부 항목별로 좌르륵 드러난다. 이를 바라보고 있자면 러닝타임 내내 관객 앞에 보여진 유정희와 김민영이란 인간을 조금쯤 깊이 이해한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친구라는 게 그렇다. 오랫동안 찾지 않아도 늘 제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으리란 믿음은 대부분 깨어져나간다. 관계는 수시로 소원해지고 만남은 대체로 기약하기 어렵다. 삶의 어느 단계에서 비슷한 궤도를 돌던 친구들이 멀어지는 걸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의 진실인 건 아니다. 다행인 건 이 모두가 단면일 뿐이지 삶이 다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중요한 건 각자의 상황을 대하는 태도이지 상황 그 자체는 아닐지 모른다.

삶과 세상을 대하는 정돈된 자세만 갖고 있다면 언제고 만나 흉금을 터놓고 어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가장 못하게만 보였던 유정희가 그러했듯이. 그 순간을 만드는 건 좀 더 여유 있는 쪽의 몫이다. 사려 깊은 이의 몫이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내게 더 여유로워지라고, 사려 깊어지라고 말한다. 좋지 아니한가.

▲ 성적표의 김민영 포스터ⓒ 엣나인필름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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