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과학이나 공학에 관심이 없다는 편견 때문일까. 그 편견을 깨고 여성 독자에게 호소하기로 마음먹은 듯한 표지를 단 책들이 가끔 눈에 띈다. 젊은 남성 둘이 함께 쓴 과학책의 표지에는 후드티를 입고 안경을 쓴 대학원생처럼 보이는 단발머리 여성이 서 있고 중년 남성 과학자가 쓴 책의 표지에도 언뜻 치마에 실험복처럼 보이는 겉옷을 걸친 여성이 있다. 또 다른 중년 남성이 쓴 인공지능 책에는 애교머리를 살짝 뺀 긴 머리에 발그레한 볼을 한 여성 청소년의 옆모습이, 여러 명의 물리학자가 함께 쓴 어떤 책의 표지에는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작은 소녀의 실루엣이 보인다. 후자의 책을 쓴 저자를 찾아보니 남녀 물리학자가 섞여 있었다.
궁금하다. 도대체 왜 과학책의 표지에 여성 이미지를 쓰는 것일까? 여성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의도라는 나의 추측이 맞는 것일까? 구매자의 성별과 연령을 보여주는 한 온라인 서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책들을 찾아보니 놀랍게도(?) 이 책들을 가장 많이 구매한 이는 모두 40대 여성이었다. 대부분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머니들이 사서 10대 자녀에게 선물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볼 수 있겠다. 누군가는 여성 청소년 독자의 입장에서도 표지에 자신과 같은(?) 여성이 그려진 책에 손이 갈 테니 더 많은 여학생들이 과학과 최신 기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좋은 표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엇이든 좋은 의도일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씁쓸하다. 이 여성들 중 누구도 실제로 존재하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책의 표지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대개 살아 있거나 살아 있었던 사람, 즉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때로는 책을 쓴 과학자이고 때로는 책의 주인공인 유명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문과 남자’조차 과학책 띠지에 큼지막하게 사진이 실린다! 그런데 앞서 열거한 과학책의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젊거나 어리다.
낯설지 않다.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 로봇을 보면서도 똑같은 씁쓸함을 느꼈었다. 에버, 에리카, 지아지아는 각각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개발한 안드로이드의 이름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모두 20대 여성의 모습을 닮았다. 홍콩 출신의 휴머노이드 셀럽 소피아 역시 젊은 여성의 모습이다. 다들 이름은 있지만 가상의 존재들이다. 반면 중년 남성처럼 생긴 안드로이드 로봇도 있다. 일본과 덴마크의 로봇공학자 이시구로 히로시와 헨리크 샤르페는 각각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다. 한국의 대표 휴머노이드 휴보는 한때 아인슈타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흰머리의 아인슈타인 얼굴을 장착하기도 했다. 로봇의 세계에는 잘생긴 가상의 20대 남성도 없지만 중년 여성 과학자나 공학자도 없어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대중화되면서 가상 세계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더 많아졌다. 그중 과학책 표지모델이 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된 그 많은 이름 없는 여성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발 나의 추측이 틀리기만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