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 416] 영화 <본인 출연, 제리>▲ 영화 <본인 출연, 제리> 스틸컷ⓒ (주)왓챠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01.
"제 결백을 밝힐 수만 있다면 협조하겠습니다."
제리(제리 슈 분)는 미국 올랜도에 살고 있는 대만계 미국인 남성이다. 40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살아온 그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바다를 건넌 이민 세대에 해당한다. '풍요로운 죽음보다 가난한 삶이 낫다'는 중국 격언을 실천하며 자신을 위해서라곤 한 푼도 쓸 줄 모르고 아등바등 살아온 그는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 공안부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자신이 화폐 위조와 돈세탁 혐의가 걸린 국제적인 사기 사건의 용의자로 수배됐다는 것이다.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모든 자산을 동결하고 중국으로 송환하겠다는 말에 제리는 누명을 벗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잘 짜인 이야기와 수화기 너머 조력자의 완벽한 호흡에 어떤 의심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채로. 이 모든 상황이 보이스피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다.
영화 <본인 출연, 제리>는 제목 그대로 실제 범죄 사건에 연루된 바 있는 인물 제리 슈가 직접 스크립트를 완성하고 출연까지 하며 완성한 작품이다. 전문 배우를 캐스팅해 온전한 극영화의 형태를 취한 것이 아닌, 자신과 세 아들, 그리고 전처가 직접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며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재연과 실제 사건이 결합된 형태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영화의 엔딩크레딧에서는 실제 사건에서 이용된 증거와 자료가 극 중에서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연출된 상황에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완성하는 모큐멘터리(Mockumentary) 장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독특한 형식의 접근법이다.
실제의 사건을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형식의 구조화된 기법과 프레임 속에서 완성하려 한 가장 큰 이유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극영화의 모호성이 증가할 때, 오히려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당사자인 제리가 극을 이끌어나가는 식의 구조 또한 관객이 그의 시선과 관점에 오로지 의지하게끔 만들어 그 경험을 극대화하도록 유도한다. 영화의 시작에서 '실화'와 관련된 여러 문구가 반복돼 제시되는 과정 끝에 '실화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의 연출에 속한다.
02.
오프닝 장면에서 제리의 실제 가족 모습이 담긴 홈 비디오 화면이 제시되는 것으로부터 이 작품을 연출한 로렌스 첸 감독이 얼마나 영리한 방식으로 이 극을 구성하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는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사건을 어느 피해자의 실수나 무지로 몰고 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리라는 인물이 가진 배경이 첫 시작에서 그려지는 이유고, 이후의 장면들을 통해 그가 은퇴한 인물이며, 이혼과 분가를 통해 홀로 지내는 상태임을 분명히 밝히는 까닭이다. 일종의 고립감이라고 해야 할까? 특정한 감정 위에서 피할 수 없는 보이스 피싱 범죄에 휘말리게 되는 그의 모습은 반대 지점에 놓인 범죄자들의 치밀하고 정교한 사기 행각을 더 두드러져 보이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민 온 세대가 가진 가족과 고국에 대한 내면적인 측면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제리라는 인물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협박은 '모든 자산의 동결과 중국으로의 송환 인도'에 있으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처한 위협과 어려움을 다른 가족에게 이양하거나 분산하고자 하지 않는다. 중국 공안부 소속이라는 장 순경과 오우 형사가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개인의 책임감 또한 그가 꾸며진 사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활용된다.
▲ 영화 <본인 출연, 제리> 스틸컷ⓒ (주)왓챠
03.
"난 진짜인 줄 알았거든. 정말."
몇 차례에 걸쳐 수만 불에 달하는 금액을 피싱 일당에게 전달하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다가온다. 주변으로부터 고립된 인물이 감정적으로 포획된 상황에서 홀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의심을 거두지 못한 은행 직원(현실)이 그를 돕기 위해 나서보지만 이미 수화기 너머의 존재(거짓)와 더 가까워져 버린 그를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다.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는 지점에서 제리가 전화를 받는 컷을 여러 장면 이어 붙인 짧은 시퀀스가 놓이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마치 프레임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는 이 지점에서 관객은 인물이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믿게 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영화는 온전히 제리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범인들이 제복을 입고 마치 경찰인 것처럼 등장하는 이유도 그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고, 이런 설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간접적인 경험이 가능하게끔 하는 역할도 한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쩌면 잊고 싶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지난 시간과 사건을 매체의 기록을 위해 다시 한번 경험하는 인물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그는 말미에 마련된 인터뷰를 통해 다소 공식적인 소회를 밝히지만, 분명 카메라 앞에서는 밝힐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마음이 그 내면에 떠올랐을 것이다.
어떤 범죄보다 보이스 피싱의 가장 악랄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제 손으로 범죄자의 요구를 들어주고, 주변 어떤 누구의 만류와 도움도 스스로 거부한 채 사건의 구렁텅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 이 사실은 해당 인물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자조하고 업신여기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사건의 피해가 모두 드러나고 난 뒤에 가족들 앞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제리의 모습처럼.
▲ 영화 <본인 출연, 제리> 스틸컷ⓒ (주)왓챠
04.
이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건 이후 인물의 삶을 포착하고자 한다. 일련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는 한 사람의 태도와 불완전하면서도 서로를 놓지 않으며 나아가고자 하는 가족이라는 특수한 집단의 아름다움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이 들기 마련이고, 늙는다는 일은 자연스럽게 사회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더 다양한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 인지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제리 역시 자신이 사람을 너무 믿어서 그랬다는 자조 섞인 소회를 내놓지만 그의 잘못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 전체를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나.
그래서일까. 어떤 측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두려움이라는 감정 속에서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이야기처럼도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직간접적으로 접하는 수많은 정보와 상황들에 진실과 허구가 얼마나 혼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결국 보이스 피싱 사기의 조작된 현실이라는 것이 우리가 가진 그런 감각의 허점을 파고드는 범죄이기도 하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제리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잃으며 체득한 교훈을 이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 모두가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직접 그 상황을 경험하기라도 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