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대기만성형' 손현주 출연, 560만 관객 동원 스릴러 <숨바꼭질>지난 1991년 KBS 공채 14기 탤런트로 데뷔한 이병헌은 <바람 꽃은 시들지 않는다>에 출연한 후 수목 드라마 <아스팔트 내 고향>과 일일 드라마 <해 뜰 날>, 청춘 드라마 <내일은 사랑>에서 잇따라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이병헌은 KBS에서 키우려 했던 대형 신인이었고 덕분에 신인 시절부터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에 주연으로 캐스팅돼 또래 배우들보다 풍부한 연기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지난 4월에 종료된 <눈물의 여왕>을 역대 케이블드라마 최고시청률(24.85%)로 이끈 김수현은 현재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지난 2007년 시트콤 <김치 치즈 스마일>을 통해 데뷔한 김수현은 2011년 <드림하이>에서 송삼동을 연기할 때까지 여러 드라마에서 조·단역을 맡거나 주인공 아역을 주로 연기했다. 무명 시절이 길진 않았지만 데뷔와 함께 주연이 된 경우도 아니었다.
이처럼 오늘날 '스타'라고 불리는 배우들 중에는 이병헌이나 손예진, 임지연 등처럼 데뷔 초부터 주연으로 커리어를 쌓으면서 경력을 이어온 배우도 있지만 결코 짧지 않은 무명 시절을 보낸 배우들도 적지 않다. 2013년에 개봉한 허정 감독의 공포 스릴러 <숨바꼭질>을 통해 데뷔 23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의 단독 주연을 맡은 손현주(59) 역시 긴 무명 시절 끝에 뒤늦게 빛을 본 대표적인 '대기만성형 배우'다.
▲ 손현주는 2013년에만 두 편의 영화로 1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배우로 떠올랐다.ⓒ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데뷔 20년 만에 정점 찍은 늦깎이 배우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손현주는 1991년 KBS 공채 14기 탤런트에 합격하면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병헌을 비롯해 김정난, 김호진, 손호균, 배도환 등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손현주는 일찍 빛을 보지 못했다. 실제로 데뷔 초 <딸부잣집>이나 <모래시계> 같은 '레전드 드라마'에 출연했음에도 시청자들에게 각인될 만큼 인상적인 캐릭터를 맡지 못해 무명 생활을 전전했다.
그러던 1996년 국민 드라마 <첫사랑>에서 최수종, 배용준의 매형이자 송채환의 아내인 밤무대 가수를 연기하면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도 손현주라는 이름보다는 '주정남'이라는 캐릭터 이름이 더 유명했다. 그렇게 2000년대 중반까지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낯선 배우'로 활동하다가 2007년 <장밋빛 인생>을 통해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손현주는 <장밋빛 인생>에서 고 최진실의 바람 난 남편 반성문 역을 맡아 시청자들의 미움을 샀다. 그 후 <솔약국집 아들들>과 <이웃집 웬수>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였다. 2012년에는 <추적자 더 체이서>에서 백홍석 형사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며 그 해 S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47살에 실질적인 첫 단독 주연을 맡은 드라마로 숨겨둔 에너지를 폭발하며 진가를 증명한 것이다.
<추적자>를 계기로 잠시 뜸했던 영화 활동을 재개한 그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남파부대 교관 김태원, <숨바꼭질>에서 결벽증을 가진 사업가 백성수를 연기했다. 2013년 출연한 두 편의 영화는 1255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5년에도 <악의 연대기>와 <더 폰>이 차례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스릴러 장르에서 강세를 보였다.
2016년 <시그널>에 특별 출연한 손현주는 2020년 <이태원 클라쓰>에서 박새로이(박서준 분)의 아버지를 연기하며 오랜만에 인자한 캐릭터를 맡았다. 2020년과 2022년에는 두 시즌에 걸쳐 방송된 <모범형사>에서 터프함과 의리로 무장한 열혈형사 강도창을 연기했다.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그는 오는 12일 첫 방송되는 ENA 드라마 <유어 아너>에서 판사로 변신할 예정이다.
신인 감독의 저예산 영화? 봉준호 기록 깼다 ▲ <숨바꼭질>은 25억 원의 많지 않은 제작비에도 전국 56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2013년 1월부터 4월까지 촬영해 그 해 8월에 개봉한 <숨바꼭질>은 손현주가 배우 데뷔 23년 만에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정점을 찍었을 때 고른 첫 단독 주연영화다. 사실 <숨바꼭질>은 상업영화로는 '저예산'에 가까운 25억 원의 제작비에 장편영화를 만든 경험이 없는 30대 초반의 신인 허정 감독이 연출한 영화였다. 한마디로 연기대상을 수상한 배우가 출연하기엔 다소 약한 영화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신인 감독의 저예산 영화를 자신의 첫 단독 주연영화로 선택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름 성수기의 끝자락에 개봉한 <숨바꼭질>은 전국 560만 관객을 모으는 이변을 일으켰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525만)이 가지고 있던 스릴러 영화 최다관객 기록을 경신한 새 기록이었다(현재는 687만의 <곡성>이 스릴러 영화 최다관객 기록을 가지고 있다).
<숨바꼭질>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 나올 거 같은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사실은 여느 스릴러 영화처럼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이다"는 주제의 영화다. 어린 시절 형과 관련해 거짓말을 한 것에 트라우마가 있는 성수(손현주 분)와 형 성철(김원해 분)의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이는 트릭이었고 사실은 주희(문정희 분)와 평화(김지영 분) 모녀가 외치는 '무주택자의 설움'에 관한 영화에 가깝다.
영화는 손현주와 문정희를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과 스릴러 특유의 분위기를 잘 유지하면서 흥행에 성공했지만 완성도 면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특히 영화 중반까지 형에 대한 백성수의 죄책감을 다양한 형태로 묘사하면서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들더니 영화 후반에 다소 뻔한 반전을 보여주면서 긴장했던 관객들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모녀가 허름한 아파트에 숨어 산다는 흥미로운 설정의 <숨바꼭질>은 2016년과 2021년 각각 중국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 중국 버전 <착미장>은 중국과 대만을 오가며 활동하는 가수 겸 배우 곽건화가 주연을 맡았다. 할리우드 버전<언노운:더 테이크다운>은 <미션 임파서블3>와 <어거스트 러쉬> 등에 출연했던 조나단 리스 마이어가 손현주 캐릭터에 해당하는 노아 블랙웰을 연기했다.
손현주에게 뒤지지 않았던 문정희의 열연 ▲ 광기 어린 연기를 선보인 문정희는 <숨바꼭질>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숨바꼭질>은 개봉 당시 '손현주의 영화'로 주목 받았고 실제 손현주도 백성수 역할을 잘 소화했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주희를 연기했던 문정희의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 문정희는 딸과 함께 집을 옮겨가며 기생하다가 원래 살던 가족을 죽이고 그 곳에서 살겠다며 폭주하는 주희 역할을 소름 끼치게 연기했다.
지난 2019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 전미선은 <숨바꼭질>에서 백성수의 아내 민지 역을 맡았다. 민지는 백성수와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 살 때까지 그의 형 백성철의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백성철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고 혼란을 겪는다.
<숨바꼭질>은 두 아역 배우의 연기대결(?)도 볼거리였다. 만 18세, 고등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에 이미 두 편의 천만 영화를 포함해 4300만 관객을 동원한 김수안은 <숨바꼭질>에서 백성수의 막내딸 수아를 연기했다. <왔다 장보리>의 비단이로 많이 사랑을 받았던 김지영은 주희의 딸 평화 역을 맡아 영화 오프닝과 엔딩의 내레이션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