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딸에 대하여찬란 제공가족. 악취가 나든 맑고 산뜻하든, 가족은 공기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 대상이다. 살면서 수도 없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일 텐데, 입을 조그맣게 오물거리면서 “가족-” 하고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뱉다 보니 이 단어가 점점 더 어색해진다.
가족. 최근에는 점점 더 낯설어지는 말인 것도 같다. 가끔 개그 프로에서 “가-족.같다”는 식으로 끊어 말하며 ‘기역’ 발음을 ‘지읒’ 발음으로 왜곡하는 걸 들을 때 오히려 익숙해지는 느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가족을 웃음거리로 삼아 그 단어가 가진 무게를 덜어내려고 한다. 사랑과 혈연으로 맺어져 쉽게 끊을 수 없는 인연. 그래서 족쇄가 되고 마는 관계. 가족은 복잡다단한 의미망 속에 들어 있다.
가족은 움직이는 거야찬란 제공가족. 하지만 정말 가족이란 고정된 무엇이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여성학자 김순남은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서 가족사회학자 데이비드 모건의 말을 빌려 이렇게 썼다. “가족은 동사다.” 가족이란 완성된 의미로서 세상에 떨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관계 안에서 누가 무엇을 하며, 어떤 ‘가족 되기’를 실천하는지에 따라 그 성격과 형태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가족’이란, 사물의 본질적인 성격을 상정하는 명사가 아니라 사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일 수밖에 없다. 가족이 어떻게 변하니? 우리는 유명한 영화 대사를 패러디해서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답을 안다. “가족은 움직이는 거야.”
여기 이상한 가족이 있다. 엄마(오민애)는 세상을 떠난 남편과 함께 일궈온 집 한채와 그가 병치레를 하면서 남긴 빚 한다발을 안고 홀로 살아가는 요양보호사다. 그의 딸 그린(임세미)은 독립 뒤 동성연인과 7년을 동거해온 시간강사다. 엄마는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메워지지 않는 심연이 놓여 있다. 영화 ‘딸에 대하여’ 속 가족이다.
하지만 한국의 주거 불안정은 ‘가-족.같은’ 심연의 무게조차 감당하게 할 만큼 사람을 절박하게 만들곤 한다. 갑자기 오른 전셋값 때문에 졸지에 전세 난민이 된 그린은 애인 레인(하윤경)과 함께 엄마 집으로 들어오고, 엄마는 당황한다. 2인용 그릇, 두 개의 베개, 밤마다 딸의 방에서 들려오는 일상을 나누는 재잘거리는 소리. 모든 것이 끔찍할 뿐이다.
엄마의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 건 이뿐이 아니다. 근무하는 요양원의 상황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 엄마가 돌보는 치매노인 제희(허진)의 상태가 나빠지면서 감내해야 하는 육체노동의 강도가 나날이 높아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건 홀로 나이 드는 제희가 경험하는 소외와 폭력이다. 유명 작가로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아이들을 돌보고 후원했던 제희의 노년에는 기저귀와의 사투만이 남았을 뿐이다. 제희를 돌보면서 그를 존경하게 된 엄마는 제희의 노년을 다르게 쓰고 싶다. ‘기저귀와의 사투’는 가족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운명이 아니다. 그건 생산성과 소비력 중심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우리 시대가 강요하는 비극에 가깝다.
엄마에게 있어 딸의 낯선 사랑에 대한 거부감은 제희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이 결국은 돌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외로운 말년으로 이어질 거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그린은 말한다. 엄마 같은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고. 그냥 사랑하게 둔다면, 가족으로 살아가게 보장한다면, 아니,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만 해도,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동성애자가 공산 혁명을 할까 봐 두렵다면, 혁명을 할 필요가 없는 조건을 제공하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역사가 혁명의 역능을 길들여온 유구한 방법 아닌가?)
야박한 엄마 이해되는 오민애의 연기찬란 제공가족이 동사라면 ‘비정상적인 가족’이란 낙인은 불가능해진다. 고정된 정상 상태를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가족은 언제 어디서고 명사였던 적이 없다. 가족은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만큼 각자의 특수성을 가진다.
돌이켜 보면 이미랑 감독은 꾸준히 동사로서의 가족에 주목해왔다. 2005년에 공개한 첫 단편에선 당시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펼침막을 모티프로 여성을 매매하는 국제결혼 시장이 어떻게 이성애 핵가족에 대한 낭만적인 관념을 처절하게 배신하는지 보여주었다. 작품의 제목 역시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였다. 2007년 작품인 ‘목욕’에선 트랜스젠더 동생과 시스젠더 언니가 아무도 없는 새벽, 함께 목욕탕에 가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가족이란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한배’에서 태어나서가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노력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이 된다.
나는 종종 그의 작품에 대해 생각했고, 그가 이야기를 상상하는 능력이 뛰어난 만큼이나 ‘선정적인 소재’를 고르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이미랑의 작품에는 매력이 있었고, 그 매력이 좀 불편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장편 데뷔작인 ‘딸에 대하여’에 이르러서 그것이 그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꾸준한 관심사였음을 깨닫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뚝심 있게 해내는 감독의 작품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운명이다.
네 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앙상블 역시 훌륭하다. 그중에서도 1인칭 시점으로 2시간의 영화를 끌고 가는 엄마 오민애의 연기에는 끝내 그 야박한 태도를 이해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다. 그는 올해 여러 편의 영화에서 얼굴을 보였는데, 특히 ‘파일럿’에서 트로트 가수 덕질에 몰두하는 엄마는 관객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2024년 오민애는 ‘엄마’의 삶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엄마’로 살아온 시간이 가진 힘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딸에 대하여’는 이 사회가 단편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쉽게 소비해버리곤 하는 성소수자의 삶, 노인의 삶, 여성의 삶의 “일상적인 질감”(수전 팔루디)을 잘 살려냈다. 어디에 살 것인가, 누구와 살 것인가, 어떤 삶을 꾸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의존하고 어떻게 돌볼 것인가의 문제가 그 일상에 얽혀 들어가는 건 당연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작품이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