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퍼의 빛정재훈 | 한국 | 2024년 | 147분 | 본선 장편경쟁열댓명의 10대가 차례로 등장한다. 주변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아이라고 불릴 만한 친구들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무척 시끄럽고 특별한 본모습을 가상 세계에서만 드러낸다. <에스퍼의 빛>은 가능성, 도전, 실험 같은 키워드들이 머릿속을 휘젓는 미래 영화다. 집과 학교, 교통수단을 오가는 한국 10대 청소년들의 단조로운 일상과 이들이 접속한 온라인의 무한한 세계를 교차한다. ‘괴력의 아이들’, ‘새벽의 파편’ , ‘기뇌국’이라는 판타지적인 3장 구성에서 청소년들은 원하는 성격과 능력, 생김새를 가진 캐릭터로 분해 가상의 대자연과 황무지, 미래 시티를 활개친다. 수험생도 어느 부모의 자식도 아닌 주체적인 방랑자이자 모험가로 그려지는 청소년이 굉장한 해방감을 준다. B급 장르영화의 투박한 분장과 소품, 어설픈 괴수가 키치적인 매력으로 작용한다. 비전문 배우들의 예측 불가능한 연기, 기승전결로 구분할 수 없는 서사, 파편화된 감정들이 난해할 수 있지만 보고 나면 별세계를 여행하고 온 듯한 황홀감을 안긴다. /이유채
(환영합니다) 난초의 행성입니다박지윤 | 한국 | 2023년 | 63분 | 본선 장편경쟁인간들이 자신을 ‘식집사’라고 칭할 때, 식물원을 찾아 예쁘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을 때, 식물의 심정은? 난초가 주인공, 내레이터, 안내자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환영합니다) 난초의 행성입니다>는 식물 일부가 된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난초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다른 차원의 시각적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이 땅이 나무와 곤충, 여타 생명체가 함께 생활하는 공유지라는 걸 순간순간 일깨운다. 식물의 주인 행세를 하는 인간의 알량한 모습을 포착한 장면과 인간 사회의 소식을 전하는 식물 세계의 뉴스 화면에선 블랙코미디적인 유머가 발생한다. 인간에게 보내는 식물의 경고를 다양한 시도를 통해 전달한다. “모든 인간이 우리의 역사, 문화 및 삶을 방식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라는 선언이 식물의 소리로 전달될 때의 파장이 길고 깊다. 난초의 속살까지 들어가 꺼내 보일 땐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쓰지 말라는 식물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다년간 다종민족지학, 보전생태학을 연구하고 에코시네마를 지향해온 박지윤 감독의 노작이다. /이유채
고백하지마류현경 | 한국 | 2024년 | 70분 | 페스티벌 초이스배우들은 종종 영화가 현실로 돌출되는 순간의 당혹감을 마주하게 된다. 김오키의 장편영화 <하나, 둘, 셋, 러브>에서 주연배우였던 류현경의 상황이 그러하다. 그가 맡은 주인공 수정이 변변찮은 남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듯, 극 중 수정을 흠모하던 보라 역의 동료 배우 충길이 뒤풀이 다음날 현경에게 고백을 한 것이다. 현경은 충길의 고백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이는 촬영장 전반에 어색한 기류로 번진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현경과 충길은 서로 다른 이유로 부산에 도착한다. 류현경의 첫 장편 <고백하지마>는 배우가 배우로서 온전히 존재하는 영화다. <하나, 둘, 셋, 러브>에서 다중 인물을 소화하느라 지친 그는 더는 허구이기를 포기하고 현실에 정박하려는 모양새다. 배우들이 나눈 일상적인 대화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이 매 장면을 연기인지 실재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우연과 무작위의 세계를 투박하게 품는 김일두, 탁경주 등 부산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이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최현수 객원기자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박효선 | 한국 | 2024년 | 103분 | 새로운선택동경의 대상이 할리우드 배우라고 해서 만남의 가능성을 포기해야 할까? 이 물음에 ‘노’를 외친 박효선 감독은 메릴 스트리프를 만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에 같은 동시대 페미니스트 영화인으로서 메릴 스트리프와 대화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진 그는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지만 쉽지 않다. 어디로 메일을 써야 하는지부터 다 된 뉴욕행을 막는 코로나19의 습격까지 가는 길마다 가시밭길이다. 그러나 메릴 스트리프를 닮아 호쾌하고 진취적인 그는 쉬어가되 그만두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는 없는 길을 뚫는 ‘개척담’이자 한국 페미니즘의 현재를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프로젝트는 진행 과정에서 크라우드펀딩 초과 달성의 기쁨과 어렵게 연결된 메릴 스트리프 담당자가 퇴사하는 슬픔을 맞는다.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희망과 좌절의 순간이 만남 성사에 대한 관객의 호기심을 끝까지 자극한다.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하며 몸소 겪은 한국 사회의 진통과 한국 여성들의 변화를 바라는 목소리를 한가득 품은 감독의 발걸음이 진실한 감동을 안긴다. /이유채